[O2/ISSUE]고려 국운 기울수록 더 섬세-찬란해진 슬픈 불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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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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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은 고려불화의 두 얼굴

(왼쪽) ‘아미타내영도’(14세기 전반), 이탈리아 국립동양예술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 105.6×347.0cm. 아미타불의 이미지를 크게 부각해 강조한 고려시대 전형적인 아미타내영도다. 이탈리아 박물관 측에서 일본 불화로 오인하고 구입했다고 한다. (가운데) ‘아미타여래상’(남송시대), 일본 사이후쿠사 소장, 비단에 채색, 38.5×97.0cm. 닝보 불화인 이 작품은 적색과 녹색의 가사를 입고 있는 아미타불뿐만 아니라 물방울 모양의 광배 그리고 장식적인 구름까지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했다. (오른쪽) ‘아미타불도’(14세기 후반), 일본 쇼보사 소장, 비단에 채색, 87.2×190.0cm,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불화는 일본에서 ‘붉은 석가’라고 불린다. 일본인들이 가사의 붉은색에 강한 인상을 받고, 아미타불을 석가모니불로 인식한 점이 흥미롭다.
(왼쪽) ‘아미타내영도’(14세기 전반), 이탈리아 국립동양예술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 105.6×347.0cm. 아미타불의 이미지를 크게 부각해 강조한 고려시대 전형적인 아미타내영도다. 이탈리아 박물관 측에서 일본 불화로 오인하고 구입했다고 한다. (가운데) ‘아미타여래상’(남송시대), 일본 사이후쿠사 소장, 비단에 채색, 38.5×97.0cm. 닝보 불화인 이 작품은 적색과 녹색의 가사를 입고 있는 아미타불뿐만 아니라 물방울 모양의 광배 그리고 장식적인 구름까지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했다. (오른쪽) ‘아미타불도’(14세기 후반), 일본 쇼보사 소장, 비단에 채색, 87.2×190.0cm,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불화는 일본에서 ‘붉은 석가’라고 불린다. 일본인들이 가사의 붉은색에 강한 인상을 받고, 아미타불을 석가모니불로 인식한 점이 흥미롭다.
《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는 불행히도 수없이 많다. 그중 유독 국내에선 보기 힘든 문화재가 있다. 바로 고려 불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보관을 소홀히 한 탓이 가장 크다. 빈번했던 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거나 약탈당한 작품도 꽤 많았다. 외국에서 구입해 가거나 귀한 선물로 보낸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130여 점의 고려 불화가 애지중지 보관된 덕분에, 자칫 잊힐 뻔했던 고려 불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1978년 일본 교토의 야마토(大和)문화관에서 처음 ‘고려 불화 특별전’을 열었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있는 고려 불화는 5점이 채 안 됐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애써 들여왔지만, 국내의 고려 불화는 지금도 15점 안팎에 불과하다. 그나마 국공립박물관에는 한 점도 소장돼 있지 않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고려 불화는 해외에서 발견될 때마다 큰 주목을 받곤 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이탈리아 국립동양예술박물관 소장 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가 세간의 화제가 된 것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아미타내영도의 광배 부분에서 발견된 보수 흔적.
아미타내영도의 광배 부분에서 발견된 보수 흔적.
길게 내민 극락의 손

아미타내영도란 극락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인 왕생자(往生者)를 인도하기 위해 아미타불이 오른손을 길게 내민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다. 여기서 극락은 무엇이던가. 아무런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 극락으로 안내하는 아미타불의 손길은 무엇보다 반가워 보일 수밖에 없다.

고려 후기 불화 중에는 아미타불도뿐만 아니라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관경변상도 등 아미타신앙과 관련된 그림이 많이 전한다. 그만큼 이때의 불교는 극락에 가기를 바라는 기복(祈福)적인 성격이 강했다.

당시 불화를 제작하는 동기로는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행복이 함께 내세워졌지만, 방점은 역시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후자에 찍혔다. 고려시대 전기에 교리적이고 합리적인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후기에는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불교가 성행했다. 이는 무신정권의 지배가 이어지고, 원나라가 국내 정치에 간섭하게 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불화는 무엇보다 화려한 장식이 특색이다. 원나라 미술이론가인 탕구(湯垢)는 역대 회화를 품평한 책인 ‘고금화감(古今畵鑑)’에서 “고려의 관음상은 교묘(巧妙)하고 섬려(纖麗)하다”고 평했다. 탕구는 관음상을 지칭했지만, 이 평을 고려 불화 전체에 적용해도 별 무리는 없다. 교묘하다는 말은 테크닉이 뛰어났다는 뜻이고, 섬려하다는 것은 섬세하고 화려하다는 의미다. 누구보다 기교와 장식에 익숙한 중국인의 시각으로도 그러했으니, 고려 불화의 섬세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인들은 불화에 선 하나라도 더 긋고, 점 하나라도 더 찍으며, 면 하나라도 더 나누려 애썼다. 그것이 곧 공덕을 쌓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섬세함과 단순함의 절묘한 균형

중국의 닝보(寧波) 불화와 비교하면, 고려 불화에 나타난 장식의 의미를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닝보는 신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무역항이다. 신라 때에는 명주(明州)라 불렀다. 이곳을 통해 중국 월주요(越州窯) 청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이는 고려청자 기술을 개발하는 계기가 됐다. 불화도 마찬가지다. 남송과 원나라 때 닝보 불화들이 고려와 일본에 수출됐다. 닝보에는 수출용 불화를 제작하는 공방(工房)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김대수(金大受) 육신충(陸信忠) 장사훈(張思訓) 보열(普悅) 등이 이때 활약한 화가들이다. 최근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아미타내영도’도 닝보 불화와 연관이 깊다. 이 그림은 일본 후쿠이(福井) 현 사이후쿠(西福)사에 소장된 같은 주제의 닝보 불화 ‘아미타여래상’과도 많이 닮았다. 근엄한 아미타불의 상호(相好·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와 오른손을 내민 자세가 비슷하고, 붉은 가사에 들어 있는 금색의 원 무늬, 커튼처럼 주름진 치마의 단, 연꽃으로 꾸며진 대좌 등 공통된 특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아미타불을 둘러싼 배경 그림은 차이가 있다. 닝보 불화의 배경은 물방울 모양의 광배와 구름들로 채워져 있다. 반면 고려 불화는 아미타불만 크게 부각시키고 배경은 공백으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섬세한 이미지를 장식하는 데 쏟는 열정이 무색할 정도다. 이것은 장식성을 견제하는 또 다른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단순함의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간결하고 단순함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내재적인 성향이었다. 고려인들은 외형은 단순하지만 내부는 세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상반된 두 힘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췄다. 장식을 아무리 화려하게 하더라도 이미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고, 배경은 시원하게 비워 두었다. 이미지를 그린 윤곽선을 장식 표현의 마지노선으로 삼았다. 고려의 화승들은 제한된 윤곽선 안에서 장식의 열정을 한없이 불태웠던 것이다.

화려함 속에 숨겨진 진실

환하게 빛나는 고려 불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라. 놀랍게도 사용된 색채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붉은색, 녹청색, 군청색 정도가 전부다. 그럼에도 고려 불화가 화려하게 보이는 비결은 금니(金泥·금박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의 사용에 있다. 고려 불화에선 이미지의 곳곳을 금니 선으로 장식했다. 부처님의 신비한 광명세계를 눈부시고 찬란한 황금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 쇼보(正法)사에 소장된 ‘아미타불도’는 고려시대 아미타내영도 가운데 가장 화려한 불화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오른손을 길게 내민 자세, 붉은색 가사와 녹색 내의의 대비, 커튼 같은 주름진 치마의 끝단, 연꽃의 대좌는 앞서 본 불화와 다름이 없다. 다만 가사에 그려진 금니의 원 무늬는 다른 불화들에 비해 많은 수가 촘촘히 배치됐다. 국립동양예술박물관본의 붉은 가사엔 원 무늬가 46개인데, 쇼보사본에는 91개나 된다. 무늬도 단순한 원의 표현이 아니다. 그 세부를 보면, 연꽃들과 S자 모양의 넝쿨이 어우러져 있다. 녹색 내의 안에도 봉황과 구름무늬들이 금니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고 있다. 섬세한 무늬의 표현이 이 불화의 매력인 것이다. 만일 고려인들의 생각처럼 선을 긋는 정성이 공덕에 비례했다면, 이 불화를 시주한 이는 누구보다 먼저 아미타불의 손에 덥석 잡히는 행운을 누렸으리라.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불화의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절정에 이를 무렵, 고려 왕조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췄다. 장식에 쏟아 붓는 기복적인 믿음은 불화를 점점 섬세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치닫게 했다. 12세기보다 13세기 불화가 더 세밀하고, 14세기의 작품은 그보다 더 장식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치 풍조가 한몫을 했다. 원의 간섭이 시작된 충렬왕 때, 금을 오려 피워낸 꽃과 명주실을 조여 만든 봉황새가 연회에 등장했다. 사치스러운 연회는 밤낮없이 열렸고, 기교한 놀이와 음란한 기악까지 곁들여졌다 하니 그 방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과도한 화려함은 고려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징후가 된 셈이다. 장식은 적정한 선에서 이뤄질 때 그 의미와 빛을 환하게 발하지, 그것을 넘어서면 사치가 된다. 더욱이 공적인 목적보다 사사로운 욕망에 치우칠 때는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해진다. 고려 불화의 화려함 이면에는 이런 어두운 역사가 엇갈려 있다. 야누스 같은 고려 불화의 두 얼굴은 그래서 우리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 amkakhwa@naver.com
#O2#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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