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 영턱스클럽, 터보, 쿨,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숱한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22년째 활동 중인 작곡가 윤일상(39). 그가 요즘 서울 서교동 홍익대 주변에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인디 뮤지션의 합동 공연에서 건반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주류 감성으로 무장한 히트 작곡가가 멤버로 활동하는 밴드는 이름도 아리송하다. 서울 청담동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이제 ‘요아리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불러 달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요즘 ‘올인’했다고 말하는 가수 요아리(본명 강미진·26)는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요아리’는 강미진이 스무 살 때 ‘노래 요(謠)’와 ‘메아리’를 합쳐 직접 만든 예명. 그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는 귀보다 먼저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요아리는 2007년 밴드 ‘스프링쿨러’의 보컬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가창력보다 외적 조건을 따지는 가요계에서 그의 입지는 독특해야 했다. 소속사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의 얼굴에 가면을 씌웠다. “제 미니홈피에 일상 사진을 올릴 때도 눈을 가려야 했죠. 아무리 외모가 부족하다 해도 살면서 누가 ‘가면을 쓰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요아리)
같은 기획사(내가네트워크) 이사였던 윤일상은 2008년 브라운아이드걸스 콘서트의 오프닝 무대에 선 ‘가면 쓴 아이’를 처음 봤다. “덩치는 조그만데 관객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에너지와 가창력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죠.”
그가 요아리의 사연을 알게 된 건 나중이었다. 요아리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친구들은 예쁘게 꾸미고 놀러 다닐 시간에 그는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 본 적도 없었다. MT나 소풍이란 것도 그에겐 없었으니. 가슴이 답답하면 작은 집에서 혼자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박정현의 노래를 불렀다. “양동이 속에서 울리는 제 목소리의 잔향이 예뻐서 몇 시간이고 불렀어요.” ‘요아리’는 괜한 작명이 아니었다.
요아리가 처음 무대에 선 건 ‘효도’를 위해서였다. “스무 살 때,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1등 상품이 유럽여행권이었죠. 어머니 여행 보내드리고 싶어 출전했는데 거짓말처럼 우승을 했어요.” 몸이 불편했던 모친을 위해 그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유럽여행권을 가까운 동남아여행권으로 바꿨다.
자신감이 붙은 요아리는 오디션을 통해 가요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로도 거론이 됐지만 합류하지 못했다. 윤일상은 “세계적으로 봐도 비교대상이 없는 독특한 음색과 뛰어난 가창력이 너무 아깝다”라며 요아리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초졸 학력’이 부끄러웠다는 요아리를 위해 윤일상의 부인은 일대일 과외 교습을 자청했다. 요아리는 지난해 중고교 검정을 동시에 통과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봤다. 그는 요즘 대학 실용음악과에 실기시험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요아리는 최근 윤일상이 전곡을 만든 미니앨범 ‘맘에 드니?’로 가요계에 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요즘 페이스북에 예쁘게 찍힌 제 프로필 사진을 올리는 게 너무 행복해요.” 요아리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요아리 덕에 윤일상도 꿈을 이뤘다. 로커의 꿈. “고교시절 록 밴드에서 레드 제플린, 딥 퍼플의 음악을 즐겨 연주했죠. 열아홉 살 때부터 가요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제 연주는 늘 좁은 스튜디오에 갇혀 있었는데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신나요.”(윤일상) 록 성향의 타이틀 곡 ‘맘에 드니?’는 윤일상이 중학교 시절 만들어뒀던 악절이 테마가 됐다. “제가 감사하죠. 어려서부터 일상 오빠가 만든 쿨 노래 들으면서 춤을 췄었는데.”(요아리) “22년차 작곡가로서 이제 오래가는 노래와 아티스트를 만드는 게 제 숙명이죠. (요)아리랑 함께 가고 싶어요.”(윤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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