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는 한국인과 친숙한 체코 출신 예술가들이다. 음반과 연주, 번역을 통해 소통해온 음악 문학 분야와 달리 체코의 미술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 긴 세월 우리와 단절된 동유럽 공산국가였기에 작품이 오가는 교류는 쉽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25일∼4월 21일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하는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은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다. 유럽서도 알아주는 프라하국립미술관이 1905∼1943년 활약한 화가 28명의 국보급 회화작품 107점을 통해 체코 근대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는 첫 전시다.
전시를 위해 내한한 비트 블나스 학예실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분리된 뒤 단일국가 형성과 세계대전, 나치의 지배 등 20세기 초반 격동의 시기를 보냈던 근대미술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추상미술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꼽힌 프란티셰크 쿱카, 프라하 전위미술의 기수 에밀 필라를 양대 산맥으로 집중 조명하면서 요세프 차페크, 토옌, 얀 즈르자비 등의 걸작을 아우른다. 유럽의 주류미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고유한 민족적 색채를 버무려 독자적인 보헤미아 예술로 발전시킨 여정을 살펴볼 기회다. 5000∼1만2000원. 02-6273-4242
○ 쿱카, 필라 등 20세기 초 활약 화가의 국보급 107점
1905년 프라하에서 열렸던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전시는 체코의 신진 작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그 뒤 입체주의에 표현주의적 경향을 결합하고 1910년대에는 독특하고 혁신적 형태의 체코 큐비즘이 등장했다. 쿱카와 필라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대가들이다.
서양미술사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족적을 남긴 쿱카(1871∼1957)는 수직과 줄무늬, 소용돌이 형태를 활용한 독창적 추상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번 전시에선 구상부터 추상까지 다양한 경향의 회화 작품 11점을 살펴볼 수 있다. 고대 신화의 세 여신을 모티브로 한 ‘가을 태양 연구’는 파리의 ‘살롱 도톤’에 출품했던 초기작이다. ‘쿱카 부부의 초상’은 파리에 정착했던 화가와 훗날 그와 결혼한 외제니를 그린 부부 초상화이다. 붉은색 허리띠에 민속의상을 입은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에 살면서도 체코인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와 달리 ‘푸른 골격Ⅱ’는 강렬한 색채와 형태적 운율을 살린 추상작품으로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과 차별화된다.
독일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에밀 필라(1882∼1953)는 1910년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을 접한 뒤 입체주의에 눈을 떴다. 전시에선 여인들이 전면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한 ‘아침’(1911년) 등 19점을 선보였다. 대상의 묘사에 치중했던 당시로선 파격적 작품들이다. ‘아비뇽의 여인들’과 흡사한 색감 및 화면 구성에서 피카소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 “서유럽 미술에 치중된 관심 넓힐 좋은 기회”
‘로봇’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던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와 형제인 요세프 차페크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수상가옥’ 같은 초기의 기하학적 그림과 달리 나중에는 ‘가방을 든 남자’처럼 구성적 양식으로 변화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가 대두하면서 밀로슬라프 홀리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노부인의 초상’을 발표했다. 1930년대의 경우 초현실주의 영향이 짙게 스며있는 프란티셰크 야노우셰크의 ‘담배 피우는 사람’과 요세프 시마의 ‘내가 본 적 없는 풍경의 기억’ 등이 돋보인다.
체코의 저력과 자부심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서유럽 미술에 치중한 한국 미술계의 관심을 동유럽권으로 넓히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류지연 학예사는 “체코 화가들은 빈과 파리 등과 교류하면서도 슬라브와 보헤미아 등 고유한 민족문화를 기반으로 유럽 미술계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비슷한 혼란을 겪었던 한국 근대미술의 정체성과 비교 감상하면 더 흥미롭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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