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밤, 경기 파주의 한 군 부대 연병장. 특설 무대에서 여성 9명이 춤과 노래를 시작하자 전투복을 입은 장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터뜨렸다. 무대에 선 9명. 소녀시대가 아니다. 2010년 데뷔한 9인조 여성그룹 나인뮤지스.
이들은 24일 발표된 신곡 ‘돌스’를 앞세운 1년 만의 컴백 무대를 클럽이나 방송 녹화장이 아닌 군부대로 잡았다. 가수의 신곡 발표가 병영에 마련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부에서는 나인뮤지스처럼 군의 사기 진작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연예인들을 ‘군통령(軍統領)’으로도 부른다. 몇 년 전부터 가수들의 군 위문 무대에서 장병 수백, 수천 명이 군무를 따라 추고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영상이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됐다. 누리꾼들은 이를 ‘대첩’이라 부른다. ‘씨스타의 평택대첩’ ‘헬로비너스의 가평대첩’이 회자됐다. ‘60만 장병의 소녀시대’는 따로 있었다.
○ ‘군통령’의 조건
나인뮤지스는 이날 병영에서 노래만 부른 게 아니다. 식사 시간에는 사병식당에서 직접 밥과 반찬을 배식했고, 내무반에 들러 사인도 해줬다. 내무반에 비치된 TV 속에서 보던 멤버들을 현실세계에서 마주한 병사들은 “(그들이 내 눈앞에…) 이건 조작!”이라며 흥분했다. 나인뮤지스는 많게는 한 달에 서너 차례 군 부대 행사에 초청된다. 국군방송 ‘위문열차’ 프로그램 출연이 많지만 부대에 따라 큰 행사에 따로 초청되기도 한다.
‘군통령 군(群)’을 형성하는 것은 주로 나인뮤지스, 달샤벳, 라니아, 헬로비너스 등 다인조 여성그룹들. 군통령 등극에도 조건이 있다. 첫째, 출연료가 턱없이 비싸면 안 된다. ‘모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소녀시대는 힘들다. 최정상급은 아니지만 빼어난 외모와 안무를 겸비한 중진 여성그룹들이 강세인 이유다.
둘째, 나이도 변수다. 사병 복무연령과 비슷한 20대 초반 그룹이 인기가 높다. 6인조 여성그룹 헬로비너스의 소속사 트라이셀미디어의 우영승 대표는 “멤버들 나이가 21, 22세로 사병들이 친구처럼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셋째,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안무와 가사가 장착된 노래가 좋다. 무대 위 군무(群舞)를 군무(軍舞)로 바꿀 힘 있는 후렴구가 중요하다. 나인뮤지스의 ‘티켓’, 달샤벳의 ‘있기 없기’의 후렴구는 장병들이 일제히 떨쳐 일어나 일사불란하게 손동작을 하게 만든다.
넷째, 예쁜 척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때로는 과감한 코멘트와 무대 매너도 필요하다. 댄스 경연대회 참가를 위해 무대 위로 올라온 장병의 명찰에 손을 대며 “이름이 뭐예요?” 정도는 해주는 ‘아량’이 필요하다. 나인뮤지스 소속사인 스타제국 홍보담당 권수진 씨는 “처음 군 행사에 나설 때는 수줍어하던 멤버들도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좌중을 사로잡는 노하우가 늘었다”고 했다.
○ 주러 갔다 받고 오는 위문공연
의상도 달라진다. 달샤벳의 소속사 해피페이스 엔터테인먼트의 홍주원 팀장은 “주최 측에서 ‘의상에 신경을 써 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면서 “특별히 더 여성스러운 옷을 준비할 때도 있다”고 했다. 방송 출연 때보다 치마 길이가 좀 더 짧아지기도 한다.
멤버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적은 출연료 탓에 군 행사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가요 기획사들도 최근엔 적극성을 띠고 있다. 군 행사 출연료는 일반 행사의 3분의 1∼10분의 1 수준. 출연료는 높지 않지만 행사가 많아 수익에 보탬이 되며 ‘제대 후 팬덤 형성’이라는 장기적 효과도 노려볼 만하기 때문. 위문하러 갔다가 위문을 받고 오는, 사기 진작의 즐거운 역효과도 크다.
나인뮤지스 멤버들은 입을 모았다. “신곡을 선보이는 무대라 떨렸는데 남다른 기(氣)를 받아서인지 컴백에 대한 자신감이 높아졌어요.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무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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