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 사상논쟁 대비, 한국이 ‘지적 허브’ 역할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31일 03시 00분


인문 - 사회과학계 60돌 맞아 학회장 3인 좌담

29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유호열 한국정치학회장, 김혜숙 한국철학회장, 윤병남 역사학회장(왼쪽부터)이 좌담을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인문학 위기에 따른 국민 정서의 황폐를 우려하며 차기 정부가 인문학을 진흥하고 한국이 동아시아 학계의 지적 허브가 되도록 투자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29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유호열 한국정치학회장, 김혜숙 한국철학회장, 윤병남 역사학회장(왼쪽부터)이 좌담을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인문학 위기에 따른 국민 정서의 황폐를 우려하며 차기 정부가 인문학을 진흥하고 한국이 동아시아 학계의 지적 허브가 되도록 투자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올해 한국철학회와 한국정치학회가 창립 60주년, 역사학회가 창립 61주년을 맞는다. 다른 주요 인문·사회과학 학회들도 60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다. 6·25전쟁의 폐허에서도 현대적 학회를 조직하고 학문을 발전시켜온 한국 인문·사회과학계가 환갑을 맞았다는 뜻이다.
동아일보는 29일 김혜숙 한국철학회장(이화여대 철학과 교수·59), 유호열 한국정치학회장(고려대 북한학과 교수·58), 윤병남 역사학회장(서강대 사학과 교수·57)과 만나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과제를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이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동아시아에서 역사·사상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며 한국이 동아시아 학문 소통의 ‘지적 허브’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지난해 10월 인문학 학회들이 연합해 출범한 한국인문학총연합회(인문총)가 ‘인문학 선언문’을 발표했다. 추진 중인 인문학 발전 방안은….

▽김혜숙 회장=차기 정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를 신설하기로 하고 과학기술에 힘을 몰아주는 반면 인문·사회과학의 위축은 심화되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기술표준원 등이 있는 것과 달리 인문 진흥책을 수립·시행하는 기구는 없다. 인문총은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가칭 ‘인문진흥원’ 설립이 필요하다는 안을 제출했다. 우리 사회가 세련된 빌딩과 첨단 기기로 가득한 ‘멋진 신세계’를 추구하지만 문제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인문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유호열 회장=근본적으로 대학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영상과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지식은 인터넷 포털에서 얻고 책과 신문을 멀리하니 사고방식이 단편화되고 글쓰기 실력도 떨어졌다. 인문학적 성찰보다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회계학 영어에만 매달리는 대학생들이 미래 사회를 이끌 수 있을까.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은 1996년부터 5년 주기로 반복됐으나 달라진 점은 없는데….

▽윤병남 회장=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다.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경제지상주의가 퍼졌지만 인문학의 가치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다. 각종 국가 정책 역시 인문학적 사유 없이 이뤄져 갈등을 유발하곤 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신뢰와 도덕 같은 잊혀진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김=학문마저 도구화되고 기능주의적으로 평가되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다. 당장 ‘철학해서 뭐할래’라는 물음이 문화의 천박성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학문도 사회 어젠다를 주도하기보다 현실 뒤치다꺼리에 머물고 있다. 우수한 사고력으로 큰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가 의학 법학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사회적 낭비다.

―지난 60년간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유=학회 창립 초기에는 미국의 정치학을 직수입하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세계정치학회는 한국정치학회가 회원과 논문 수 등을 기준으로 세계 5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K-데모크라시’라고 이름 붙여 세계에 알릴 정도이니 학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뀌었다는 자부심이 크다.

▽윤=국내 역사학계는 거의 전 세계의 역사 연구를 포괄할 정도로 양적으로 성장했다. 국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을 상당히 극복하고 우리 역사가 독자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 것이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학계에서 안타까운 점을 지적한다면….

▽김=과거 국내 철학계는 외국의 이론을 수입해 우리 삶을 재단하다 보니 자생적 철학의 부재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지금도 해외학술지에 영어논문을 싣는 게 우선인 풍토에서 한국어로 한국철학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한류의 시대인데 국가발전에 걸맞은 심층적 사상은 빈약하다.

▽윤=민주화과정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국사학계가 양분됐는데 토론을 거쳐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과제다. 연구영역이 세분화함으로써 분야 간 소통이 어려워진 것도 문제다. 과거에는 역사학과와 철학과가 대학의 기본이었는데 요즘 일부 대학이 철학과를 폐지하거나 역사학을 취업에 유리한 실용학문으로 만들어 관광문화학과 문화콘텐츠학과 등으로 이름을 바꾸는 세태도 아쉽다.

―지난 10년간 학계의 화두가 ‘통섭’ ‘융합’이었다면 향후 10년 안에 떠오를 새로운 화두는 뭘까.

▽김=중국이 급부상하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면서 10년 안에 학문의 장(場)이 기존의 서구에서 동아시아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학문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자칫 과거에 서구 학문에 종속되던 방식으로 중국에 종속되지 않도록 한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활용해 동아시아 학문의 소통에서 ‘지적 허브’가 돼야 한다.

▽유=동아시아에 ‘역사전쟁’ ‘사상전쟁’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야 한다. 중국이 전 세계에 공자학당을 설립하며 중국의 사상을 홍보하는 것을 보라. 이는 중국이 사상전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세팅 작업이다. 정부가 인문·사회과학이 21세기 국가동력이라는 생각으로 투자해야 하는 이유다. 한자문화권인 한중일 학계가 각 학문에 쓰이는 주요 개념과 용어를 통합해 소통의 기반을 만드는 것도 과제다.

▽윤=‘공존’ ‘공생’ ‘공감’이라는 화두도 중요하다. 경제격차 정보격차 등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에 고립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 학문적으로 중요하게 탐구될 것이다.

―과거에 비해 학계에 치열한 논쟁이 사라졌다.

▽김
=사회와 학문이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거대담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 사회에 이념갈등과 흑백논리가 강해 학자가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주장을 밝히면 보수나 진보로 낙인찍고, 편을 갈라버리는 것도 논쟁을 꺼리게 한다.

▽유=인터넷의 익명성과 무분별한 댓글 문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확산되면서 부담을 느낀 학자들에게 논쟁 기피 성향이 생겼다. 이는 학계의 동력 상실로 이어진다.

▽윤=한국 학회지는 주로 논문만 싣는데 서구 학회지는 절반 이상이 비평과 서평이다. 서로의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가 지속돼야 하는데 우리는 학계가 좁아 서로 평가하길 꺼린다.

―지난해 선거철에 폴리페서(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교수)가 문제로 부각됐다.

▽유=교수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을 정책화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강의와 연구 등 본업을 소홀히 하는 폴리페서도 있다. 고려대에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휴직 및 복직 등을 세세하게 명시한 규정을 만들고 있다.

<대담자>

김혜숙 한국철학회장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유호열 한국정치학회장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윤병남 역사학회장 <서강대 사학과 교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동아시아 역사#지적 허브#역사학회#한국철학회#한국정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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