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예언자 오라클(글로리아 포스터)을 찾아간다.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자인 바로 그 사람,
‘더 원(The One)’이 맞는지 묻기 위해서다.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네오. 거기서 마음씨 좋게 생긴 흑인 아주머니가 쿠키를 굽고 있다. 그녀가 바로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오라클. 예언자라 하기에는 사뭇 평범한 외모를 한 오라클의 모습에 네오는 조금 당황스럽다. 바로 그 순간 네오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오라클은 네오가 곧 꽃병을 깨뜨릴 것이라는 것을 알아맞힌다.
흔들리는 네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대개의 예언자들이 그렇듯이 오라클도 네오에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말들만 해준다. 네오가 진짜로 듣고 싶은 것은 자신이 ‘더 원’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이다. 그런데 그녀는 답을 주지는 않고 오히려 네오에게 되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 자신이 ‘더 원’이라고 생각해?” 네오의 대답은 솔직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것. 이때 오라클이 자기 집 방문 위에 걸린 현판을 손으로 가리킨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쓰인 글귀가 하나 있다. ‘너 자신을 알라(Temet Nosce).’
주제파악 못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바로 그 말이다. 오라클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자라는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의 말에 거의 설득됐던 네오였다. 오라클이 그 믿음에 방점을 찍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던 것인데, 너 자신을 알라니.
오라클은 네오가 ‘더 원’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듯이 그의 눈, 입, 그리고 손바닥을 자세히 관찰한다. 마치 소의 건강상태를 점검할 때 눈과 치아 상태를 살펴보는 것처럼. 그러던 오라클이 네오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어.” 자기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오라클에게 네오는 말한다. “내가 ‘더 원’이 아니군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워쇼스키 형제(이제는 남매)의 1999년 작 ‘매트릭스’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중심에는 네오가 인류를 구원할 ‘더 원’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장 먼저 놓아버린 사람은 바로 네오 자신이었다. 자신이 ‘더 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네오에게 오라클은 “소리(sorry)”라고 말한다. 오라클은 네오에게 미안했던 것일까. 네오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더 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더 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니 미안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오라클의 “소리”는 “안됐다” 또는 “안타깝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오라클은 네오가 ‘더 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네가 바로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더 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네오가 안돼 보이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소리”라고 했던 것이다. 오라클은 ‘더 원’이 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의 느낌이란 아무도 정확히 말해줄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온몸을 통해서 느껴야만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들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오라클은 네오를 안타까워했다.
네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네오의 삶은 지금까지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컴퓨터 해킹이나 하던 그런 삶이었다. 그런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니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네오 곁에는 그가 인류를 구원할 존재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네오가 ‘더 원’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트리니티(캐리앤 모스)다.
스미스 요원(휴고 위빙)에게 붙잡힌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로 들어간 네오. 그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능력으로 모피어스를 구해낸다. 이 사건은 네오가 자신이 ‘더 원’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스미스 요원마저 제압하고 매트릭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전화기가 설치된 303호 방문을 열어젖힌 네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스미스 요원이 총을 겨누고 서 있다. 총을 맞은 네오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자신도 결국 한 명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모피어스를 포함해 그동안 네오가 ‘더 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의 믿음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모두가 네오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때 트리니티는 숨이 끊어진 네오에게 다가가 말한다. 자신이 사랑하게 되는 남자가 바로 ‘더 원’이 될 거라고 오라클이 예언했다고. 그러니 당신은 죽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러곤 네오에게 키스한다. 그 순간 네오는 부활한다. 그는 매트릭스에서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당신 곁에는 트리니티가 있는가
우리가 누군가(또는 자기 자신)에게 어떤 믿음을 갖게 되면 그 사람(자기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자기 충족적 예언’ 또는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한다. 자신의 기대나 믿음을 기초로 상대방에게 했던 예언이 실제로 현실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트리니티의 믿음이 결국 네오를 ‘더 원’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피그말리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상을 사랑하게 됐다. 그를 본 여신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어 피그말리온의 꿈을 실현시켜 줬다는 내용이다. 로버트 로젠탈과 르노어 제이컵슨이 ‘교실에서의 피그말리온 효과’란 책에 쓴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는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이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믿은 학생은 8개월 안에 학업성취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능검사 점수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이 세상은 온통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스미스 요원과 매일매일 싸우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의 뜻을 기억해두자. 하지만 이것만으로 스미스 요원의 주먹세례를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를 나보다 더 믿어주는 사람, 당신의 곁에는 당신만의 트리니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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