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매우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이날 밤 아버지께서 조용히 돌아앉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자 피가 조금 나와 다시 손가락을 자르니, 마치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 오른손으로 혈맥을 누르자 선혈이 솟아나와 반 그릇 정도를 담아 미음을 타서 한 그릇을 채웠다. 드디어 할머님의 입안으로 이를 부어 다 드시게 하니, 즉시 효과가 있어 그날 저녁을 넘길 수가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효자 하진태는 위독한 어머니를 정성껏 간병했고 그의 아들 하익범은 이를 치병(治病) 일기로 남겼다. 손가락에 상처를 내 어머니에게 피를 먹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어머니의 대변까지 맛보았던 극진한 효행이 씌어 있다.
옛 일기에는 공식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소소한 생활상과 개인의 솔직한 생각이 담겨 있다. 일기가 쓰일 당시만 해도 한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에 불과했지만 이제 옛 일기는 역사의 증거이자 문화콘텐츠 소재의 보고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규장각 교양총서 제8권으로 나온 이 책은 조선시대 일기 12편을 통해 당시 사회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본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일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쓰인 것은 경상도 선산 지역에 살았던 무관 노상추(1746∼1829)의 일기다. 그는 17세 때부터 죽을 때까지 68년간 일기를 써서 굴곡진 인생사를 빼곡히 남겼다. 특히 그가 ‘취업’하기까지의 과정은 오늘날 청년구직자들이 보기에도 눈물겹다. 스물세 살에 무관이 되기로 진로를 정한 그는 수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서른다섯 살에야 합격한다. 그러고도 무겸(武兼)이라는 자리가 주어진 때는 마흔 살이 되어서였다. 그는 “하늘이 준 행운”이라며 좋아했고 무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조선시대에 일기를 남긴 사람은 대부분 양반이기에 미천한 신분이 남긴 일기는 희소가치를 갖는다. 궁중에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 조달하는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은 1891년부터 17년간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물건 납품과 매매에 대한 정보는 물론 평민의 일상까지 엿볼 수 있다. 일기에 그의 아내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는 없으나 애인과 있었던 일은 꼼꼼히 적혀 있다. 그는 애인이 아플 때 제중원에서 콧병 약을 조제해 주거나 웅담, 인삼 등을 직접 달여 먹였다. 애인이 쌀을 찧지 못해 저녁을 걸렀다고 하자 가게를 찾다가 결국 자기 집에서 밥 한 그릇을 갖다 주기도 했다. 일기를 통해 당시 음독자살이 흔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일제강점기 개화 지식인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60년간 쓴 영어일기, 사대부가의 여성 남평 조씨가 병자호란 발발 후 피란길에 한글로 쓴 일기, 비운의 생애를 살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의 삶이 기록된 ‘동궁일기’도 흥미롭다.
이 책은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에서 나아가 한 사람의 고독한 끼적임조차 훗날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위대한 역사가 아닐까. 18세기 서화애호가 유만주는 일기 쓰는 이유를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밝혔다. “진실로 일기는 가까운 것을 더욱 상세하게 하고 조금 멀어진 것을 희미하지 않게 하고 이미 멀어진 것을 잊지 않게 한다…. 일기는 이 몸의 역사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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