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와 건축전문 월간 ‘SPACE’는 건축가와 학자 등 건축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최고와 최악의 현대건축물을 뽑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문가들은 최고의 건축물로 135개, 최악의 건축물로 71개의 작품을 추천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의 역사적 사회적 가치와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는 글을 격주로 싣는다.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물로 선정된 공간 사옥(1위·김수근·1977년)과 주한 프랑스대사관(2위·김중업·1962년), 그리고 경동교회(4위·김수근·1981년)는 한국의 현대 건축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작들이다. 지어진 지 이미 40∼50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현재적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 20세기 한국 건축의 최고의 성과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건물은 김중업(1922∼1988)과 김수근(1931∼1986)이라는 걸출한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그들은 광복 이후 서구 근대건축과 처음 맞닥뜨린 건축가들이었고, 프랑스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며 개발시대 건축을 주도했다.
두 거장이 활동할 당시의 한국 사회는 치열한 동서 냉전과 압축적 경제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여건 속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들은 다음 세대 건축가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될 토대를 놓게 된다. 즉 서구 건축을 선험적인 모델로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한국적 지역성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덕분에 물적 기반이 신통치 않았던 여건 속에서도 높은 수준의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근대적 제도에 걸맞은 물적 장치들을 건설해야만 했던 시대적 요구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물론 상반된 개성을 가진 두 건축가는 자주 충돌하기도 했다. 전통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처럼 김중업은 그의 스승인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보여주었던 조형 의지에 집착했다. 전통 건축의 지붕선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것을 다양한 작품들로 현대화했다. 지금은 허물어지거나 변형돼 잘 식별되지 않지만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유연한 곡선 지붕들은 그런 건축가의 의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김수근 역시 일본에서 귀국한 후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1970년대 이후 태도를 바꿔 전통 건축의 사랑방이나 마당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공간 사옥의 입구에 등장하는 빈 마당은 그가 지향했던 건축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동교회에서는 신을 향한 갈망을 상징적 형태로 표현하면서 한국 사찰에서 등장하는 외부공간을 적용시켰다. 이를 통해 새로운 종교 건축의 유형을 찾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알 수 있듯 이들 거장이 타계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신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마냥 반길 만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 건축가들은 그들의 틀 속에서 머무르며 그 변화를 선도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통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기보다는 변화를 뒤쫓으며 담아내기에 급급했다. ‘전위’의 DNA를 잃어버리면서 그들은 물적 환경의 창조자로서 건설의 전체 과정을 조율하는 전통적 지위를 상실했고 계속해서 주변화되고 상업화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두 건축가가 우리에게 남긴 부정적인 유산도 큰 몫을 했다.
많은 건축가가 지적한 것처럼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 세계가 가지는 문제점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 있다. 그들은 전후의 낙후된 현실을 회피한 채 그 자리에 과거의 전통을 가져와서 이상화시켰다. 이로 인해 현실과 건축을 순환시키는 자율적인 생성 메커니즘이 구축되지 못했고 거기서 오늘날 한국 건축계가 직면한 여러 어려움이 불거졌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한국 건축계는 성찰의 시기를 맞고 있다. 떠들썩한 잔치가 끝나면서 분주함에 가려졌던 구조적 모순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이즈음에 우리는 이들 세 건축물이 가지는 현재적 가치를 곱씹으면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현대건축은 일상과 유리된 예술 작품이 아니고 도시로부터 고립된 기념비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과거로 향했던 건축가들의 시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래로 향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건축은 이제 시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 거장이 남긴 50년의 틀을 깨고 한국 건축이 새로운 도약을 이루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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