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은 학문을 시작한 처음부터 세상의 일에 유념하여, 나라의 정치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폐단의 원인을 찾았다. 이를 바로잡을 대책을 강구하여 ‘곽우록’을 지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시대와 나라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이는 잡저(雜著)나 친구 및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많이 나타난다.” 성호 이익(1681∼1763)의 조카 이병휴가 성호의 평생 활동을 정리하면서 한 말이다. 》
조선의 유학자들은 때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데 그쳤지만 언젠가 관리로 등용될 때를 대비하여 세상을 다스릴 방안을 마련했다. 성호는 노론이 득세한 정국에서 노론 척신계에 맞서다 죽음을 당한 부친(이하진)과 형님(이잠)을 둔 처지였기에 장차 관리가 되어 역량을 펼칠 기회가 올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그날을 위해 정치적 식견을 기르고 경륜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과학 천문 지리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성호의 실학은 바로 여기에서 탄생했다.
성호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변화함을 느끼고 화이론(華夷論)이라는 이념보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변국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구분하고 중화국가에 해당하는 송이나 명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성호는 요, 금, 송, 원, 명 등 주변국과의 외교를 동일하게 다루었고 중화국가인 송과 명의 정치를 비판한 반면에 이적국가인 원과의 외교를 중시했다.
또한 그는 중국보다 만리장성의 바깥 지역이 훨씬 넓으므로 미래의 인재는 틀림없이 그곳에서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점차 넓어지는 세계를 느끼고 있었고 오랜 강대국이었던 중국은 그렇게 넓어진 세계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 성호가 기존 통설을 따르기보다 의심에 의한 자득(自得)을 중시하고 외부 세계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열린 지식인’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성호는 지식의 축적을 토대로 한 기술의 발전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그는 성인의 지혜라 해도 미진한 점은 있으며 기술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발전하여 점차 정교해진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전래된 서양 과학의 우수성과 실용성을 인정하고 적극 수용했다. 그는 서양인이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며 서양의 달력이 중국의 것보다 정확함을 확인하고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지동설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정치의 목적을 인정(仁政)에 둔 성호는 민생을 위한 정치를 중시했다. 그는 경제활동의 주체는 백성이라고 보았다. 국왕이나 관리는 백성의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장애 요인을 없애주는 대신에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받아먹는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정치 행위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편안하게 하고, 모진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감면해주는 데 초점을 두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그렇지 못했다.
성호는 경기 안산의 농장에서 늘 백성들과 접촉하며 지냈기에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동법이나 군역, 환곡과 같이 백성의 생활과 직결된 제도가 원래의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면서 생겨난 문제였다. 그는 자신처럼 농사의 어려움을 직접 경험한 사람 중에서 재능과 덕망이 있는 이를 관리로 뽑자고 했고, 과거 시험에서는 문예 능력보다 직무 수행 능력을 중시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이치를 묻자고 했다. 또한 한 가족이 최저 생활을 할 수 있는 토지(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대지주의 토지 독점을 막는 한전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성호가 마련한 개혁안은 ‘곽우록’이나 ‘성호집’의 잡저 이외에도 ‘성호사설’에 많이 나타난다.
평생을 두고 세상을 다스릴 방안을 연구하던 성호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고 성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개혁안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우리는 이들을 ‘성호학파’ 학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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