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미래유산 프로젝트는 문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 추천을 받은 근·현대 문화재들을 발굴, 보존하겠다는 의도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서울시는 접수한 1000여 건을 미래유산보존위원회에서 심사해 올 하반기 보존 대상을 확정지을 계획이다.
현재 유력 후보 가운데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박수근 고택’과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도 들어있다. 고택은 화가 박수근(1914∼1965)이 거주하며 대표작 ‘농악’ ‘나무와 여인’ 등을 그린 현장.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이란 뜻인 딜쿠샤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살던 집이다.
하지만 한 전문가의 넋두리처럼 두 곳 모두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까지 됐지만 상황이 나아지질 않는 것도 비슷하다.
○ 훼손 심한 박수근 고택
6일 오후 창신동 지하철 동묘앞 역 인근. 박수근 고택을 마주한 첫 느낌은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다. 스마트폰 지도를 검색해 겨우 찾았건만 대로변에 자리한 고택은 형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국밥 차림표를 내붙인 선술집은 굵은 자물쇠가 달린 채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려 봐도 기척이 없고, 소유주로 알려진 유모 씨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근 빌딩에서 내려다보니 일부 남은 기와지붕만이 이곳이 고택임을 가늠케 했다.
박수근 고택의 보존 여론이 인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화가가 1953∼1963년 살았던 자택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등단 작품인 ‘나목’의 배경무대라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소유주가 지정을 거부해 고택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문화재청은 “현행법상 건물주가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지정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소유주는 고택이 재정비촉진지구(뉴타운)에 들어가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면 금전적 손해를 볼까봐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와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고택을 사들이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비용 문제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정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조사연구팀장은 “뉴타운 담당 부서에 사업을 추진해도 고택은 존치해주길 요청한 상태”라며 “미래유산으로 선정된다면 다각도로 지원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처참한 몰골의 ‘딜쿠샤’
딜쿠샤는 3·1운동을 해외로 알리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UPI통신 서울특파원이던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확보해 몰래 이곳에 숨겼다가 해외로 타전했다. 일본 군경이 쳐들어왔으나 출산한 아내의 침대 밑에 감춰 빼앗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테일러는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1942년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8일 점심 무렵에 찾은 딜쿠샤는 이런 역사적 의미가 무색하리만치 처참한 몰골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의 외형은 분명 한 세기 전 근대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에 담긴 행복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묻어나질 않았다. 대낮인데도 공포영화에 나오는 폐가 기운이 풍겼다. 건물 옆에 무허가가 분명한 목조 판잣집까지 덧붙어 전경을 망쳤다.
딜쿠샤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하는 국유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빈곤층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퇴거 요청에도 꿈쩍도 않는다. 현재 약 17가구가 살고 있으나 정확한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김수정 팀장은 “1년에 몇 번씩 현장을 방문해 대화를 시도하지만 문도 안 열어준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실 팀장은 “소유자와 거주자에게 공적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시키고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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