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책장을 넘기자 윤동주의 ‘서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시어가 희미하게 보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가 1945년 2월 일본에서 옥사한 후 1948년 1월 유족들에 의해 발간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정음사)이었다.
박물관 유리 너머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한 물건을 손으로 만지니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책 주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 책이 얼마 전 (경매에서) 거래됐는데 아마 3000만 원이었지요.” 시집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설 연휴 직전 찾아간 경기 용인시 죽전동 배우식 시인(61)의 집은 문학관 같았다. 아니, 웬만한 문학관보다 희귀 시집들이 많았다. 책들은 방 2개의 사면을 가득 채우고, 거실 책장과 베란다에도 넘쳐 나와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었다. 시집만 줄잡아 1000여 권. 대부분 초판본이다. 그의 소장 희귀본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시인은 1999년 시문학으로 등단해 2005년 시집 ‘그의 몸에 환한 불을 켜고 싶다’(고요아침)를 냈다.
그가 시집을 여러 권 꺼내왔다. ‘정지용 시집’ 초판본(1935년 10월 27일 발행·시문학사), 이육사의 ‘육사시집’ 초판본(1946년 10월 20일·서울출판사),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이 함께 펴낸 ‘청록집’ 초판본(1946년 6월 6일·을유문화사)이 줄줄이 나왔다. 이병기 선생의 ‘가람시조집’ 초판본(1939년 8월 15일·문장사)을 비롯한 귀한 시조집도 다수 보였다. 광복 후 첫 시집으로 평가받는 이태환의 ‘조선미’(1945년 9월), 김경탁의 ‘얼’(1946년 10월 1일·취영암)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개인이 이런 희귀본을 모을 생각을 했을까. “소장가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다”는 시인은 30여 년 전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문청(文靑)이었지만 생업을 위해 대그룹 건설회사에 다녔다. 유럽, 아프리카 현장에서 일한 그는 현지 감독관에게 선물할 예술품을 구하기 위해 귀국하면 골동품 가게를 찾았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청계천 가게에서 ‘정지용 시집’ 초판본을 발견했다. 당시 회사원 월급의 서너 배, 현재로 치면 약 1000만 원 돈이었지만 잊었던 ‘시에 대한 열망’이 떠올라 과감히 질렀다.
시간이 흘러 1994년. 그는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더니 급기야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원인을 찾지 못해 병원을 다니길 몇 년. 절망 속에서 시를 되찾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때 ‘정지용 시집’이 생각났다.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란 구절(시 ‘유리창 1’)을 읽고 또 읽었어요. 눈앞이 캄캄했는데 시를 읽으면 뭔가 환해지는 듯했죠. 시집이 제게는 별 같은 존재였습니다.”
뒤늦게 뇌종양 판정을 받은 그는 2001년 수술을 통해 건강을 찾았다. 이후 초판본을 구하려고 전국의 고서 경매장과 고서점을 돌았다. 1년에 1억 원 넘게 쓴 적도 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낡은 책을 사들이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돈도 있는데 왜 헌책을 사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
한번은 백석의 ‘사슴’ 초판본(1936년 1월 20일·자가출판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억 원을 들고 소유자를 찾아갔지만 “10억 원”으로 높여 부르는 바람에 접었다. 몇 년 전 일이다. 그는 “돈 얘기는 더 하지 말자”며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저는 수집가, 장서가가 아닙니다. 시 공부를 위해 시집을 구했을 뿐이죠. 지금도 정지용의 별이 제 가슴에 들어와 빛을 내는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제 책들이 일반에 공개돼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별이 빛났으면 합니다.”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희귀본 거래 대부분 인터넷 경매… 문학관이 ‘큰손’ ▼
고서점과 수집가들 사이의 희귀 시집 거래는 1970∼90년대 호황을 이뤘다. 2000년대 들어 귀한 시집 구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문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전국 각지에 들어서고 거래의 관문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온라인 경매로 이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거래가 크게 줄었다.
여전히 거래가 이뤄지는 곳은 있다. 인터넷 경매나 전문 경매사를 통하면 된다. 코베이나 한옥션 같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종종 시집이 올라온다. 서울 인사동 화봉문고의 여승구 대표는 “박물관, 기념관 같은 국공립 기관이 시장에 대거 뛰어든 데다 소중한 자료는 개인수집가가 잘 내놓지 않아 거래가 많지 않다”고 했다.
품귀 현상으로 값도 올라갔다. 여 대표의 설명은 이렇다. “1920년대 시집의 경우 초판본 자체가 남아있는 게 몇 권 안 되는 것으로 안다. 최근 큰 박물관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을 수배했다. 한 수집가가 억대의 가격을 불렀지만 500만 원 정도에 감정 평가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수집가들 사이의 거래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내용이 같으면 표지가 멀쩡한 것이 몇십 배 비싸다. 장서는 한정돼 있는데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경우는 적어 최근 발을 들인 수집가들은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다. 수집가들의 친목 모임에서 경매 정보가 공유되고 일대일 직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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