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패턴에 익숙한 독자라면 적잖이 황당할 수 있다. 범인을 쫓아가는 팽팽하고 압축된 패턴보다는 형사들의 자잘한 일상이 상세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수다스럽다. 읽다가 어지러울 정도다.
이를테면 작품의 주무대가 되는 ‘87분서’라는 경찰서 풍경은 어떤가. 형사가 임신한 매춘부에게 성매매 여부를 조사하는 사이, 유치장에 들어간 술주정뱅이들은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 와중에 2인조 복면강도가 잡혀 들어오고, 매춘부는 급기야 경찰서에서 출산을 해 형사들을 패닉 상태에 몰아넣는다. 더군다나 이때 살인사건 신고가 들어온다.
작품은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들을 겹치고, 연결시켜 무엇보다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마치 미드(미국드라마) 수사물을 보듯 통통 튀는 대사가 눈길을 끌고, 간간이 익살스러운 장면도 등장한다. 소설이 영상처럼 읽히는 까닭은 저자의 다른 경력으로 설명될 것 같다. 저자 에드 맥베인(1926∼2005)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 드라마 ‘형사 콜롬보 시리즈’ ‘87분서 시리즈’에서 각본을 맡았다.
소설은 한 정의 총기에 대한 의문점으로 시작한다. 대박 난 뮤지컬 공연의 백인 무용수인 샐리는 어느 날 밤 집 앞에서 총기 살인을 당한다. 앞서 다른 곳에서는 하부 마약 공급책인 히스패닉계 파코가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된다. 피해자들의 연관성은 없는 상황. 다만 살인에 쓰인 총기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소설의 대부’로 불리는 작가답게 작품은 형사의 눈을 따라가며 점차 사건의 실체에 체계적으로 접근한다. 흡사 수사 매뉴얼을 읽는 듯하다. 최초 신고자, 최초 출동한 경찰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해 피해자의 가족, 친구, 동료들로 범위를 넓히는 과정이 매우 꼼꼼하다. 이 까닭에 보통 추리소설이 두세 명의 형사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것에 비해 20명 가까운 경찰이 등장한다. 경찰들의 정보교류, 상호협력의 과정도 흥미롭다. 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경찰들에게 친절히 이름까지 달았고, 이들이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통에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87분서 시리즈’는 1956년 시작돼 50편 넘게 책으로 나왔는데, 이 책은 1983년 발표된 중기 대표작이다. 30년 전 작품이지만 예스러운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다. 살인과 살인이 꼬리를 물고, 이 가운데 범인에 대한 힌트들도 적절히 흘려주며 요즘 추리소설 못지않은 긴장감도 유지한다.
하지만 자신 있게 강력 추천하기는 힘들 것 같다.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후반 강력한 반전이 없을뿐더러 사건이 풍선의 바람 빠지듯 비실비실 해결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범인의 동기가 석연치 않으며, 그 범인의 최후도 생뚱맞게 느껴진다. 제목인 ‘아이스’의 실체가 드러날 때는 허무함마저 밀려왔다. 논리적이고 치밀한 머리싸움보다는 가볍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적합할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