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하얗고 피아노는 까맣다. 노트북은 얇아지고 휴대전화는 넓어진다. 손만 뻗으면 디자인이 잡히는 세상에 산다. 19세기 말 산업화로 대량생산이 도입되면서 만물에 디자인이 깃들었다. 예술은 산업과의 끝없는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책은 그 격동의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조사이어 웨지우드, 윌리엄 모리스, 코코 샤넬, 르코르뷔지에, 디터 람스 같은 근현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천재들의 면면을 주로 조명했다.
책 내용은 2010년 책의 원제인 ‘디자인의 천재’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로도 각색돼 영국 BBC에서 방영됐다. 디자인 입문자는 인명과 고유명사, 번역체가 많은 본문보다 흥미로운 사진에 눈길이 더 갈 듯하다. 난독증이 있는 기자는 TV 시리즈가 더 궁금해졌다.
문고판과 양장판의 중간에 선 이 책의 미덕은 다양한 이미지가 펼쳐낸 넓은 스펙트럼이다. 제품 이미지는 가구와 이정표, 의상, 조명 스탠드, 향수병, 식기, 의자, 조립식 건물, 휴대전화, 스피커에 이른다. 이들 실물 사진에 공익 홍보 포스터, 예술 사진, 잡지 표지, 팝아트 작품, 일러스트레이션, 영화 스틸 사진,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디자인을 통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더해졌다. 총동원이다. 이 정도면 글자보다 그림이 많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책은 연대기와 개론서로도 읽힌다. 당대의 정치 상황과 경제 사회적 움직임, 청년 문화가 산업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짚는다. 산업적 관점에서의 타사와의 경쟁, 예술적 관점에서의 예술가 내면의 투쟁이 어떻게 표면화됐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곳곳에 굵은 글씨체로 처리해 보여주는 디자인 천재들의 명언도 곱씹을 만하다. ‘설령 미적인 것에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제 더이상 한낱 앉기 위한 의자나 그저 몇 시인지 알려주기만 하는 시계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엘시 드 울프) ‘저렴한 가격과 어중간한 솜씨의 조합은 부패의 지름길이자 예술과 제조 전체를 파멸시키는 길이다.’(조사이어 웨지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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