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색조에 깃든 천상의 순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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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9일 03시 00분


‘백영수 회화 70년’ 전

1977년 파리로 건너간 뒤 2011년 영구 귀국한 화가 백영수의 평생 화업을 돌아보는 회고전에 나온 ‘가족’(1986년). 하늘을 쳐다보는 갸우뚱한 얼굴은 현실을 넘어선 천상의 순수성, 꿈과 이상을 향한 열망의 반영으로 풀이된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1977년 파리로 건너간 뒤 2011년 영구 귀국한 화가 백영수의 평생 화업을 돌아보는 회고전에 나온 ‘가족’(1986년). 하늘을 쳐다보는 갸우뚱한 얼굴은 현실을 넘어선 천상의 순수성, 꿈과 이상을 향한 열망의 반영으로 풀이된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아기도, 아이 업은 어머니의 얼굴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사람은 물론이고 주변 사물까지 극도로 함축된 선으로 표현돼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림인데 동화 속 풍경처럼 따스한 정감이 흘러넘친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황영성)이 기획한 ‘백영수 회화 70년’전은 속도에 쫓기는 현대인에게 포근한 정을 되새기게 한다. 올해 92세인 화가는 1947∼1952년 세 차례 전시를 통해 한국 추상회화의 시작을 알린 ‘신사실파’ 동인의 유일한 생존자다.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과 활동했던 그는 1977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년 전 영구 귀국할 때까지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던 터라 제대로 작품세계를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다. 이 전시는 한국 근현대미술 산증인의 작품을 돌아보는 첫 회고전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와 더불어 광주 무각사(주지 청학스님) 내 로터스갤러리도 소품 위주 전시를 꾸몄다. 24일까지.

전시장에는 1940, 50년대 그림과 그를 대표하는 ‘모자상’ 작업, 2000년대 이후 ‘여백, 창문’ 시리즈 등 105점이 모여 있다. 이 회고전과 별도로 3월 31일까지 열리는 미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벤 샨의 작품전, 벨기에 교류전 ‘원더러스트’(방랑벽) 같은 알찬 기획전은 덤이다.
○ 굴곡의 삶에서 길어 올린 인간의 온기

일제강점기 경기 수원에서 태어난 백 화백은 역경과 유목의 삶을 살아왔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일본에 건너간 그는 오사카미술학교를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집이 폭격당한 뒤 빈손으로 귀국해 목포서 미술교사, 광주 조선대 교수로 잠시 일했다. 20대 화가의 ‘벼락출세’에 대한 시샘에 못 이겨 상경한 그는 안정적 일상을 누렸지만 곧 전쟁이 닥쳤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사랑과 환희가 충만한 ‘모자상’을 그려 이름을 알린 그는 새로운 도전을 찾아 삶의 터전을 파리로 옮겼다. 한국적 정서에 현대적 감각을 결합한 작품으로 유럽에서 22회 개인전을 열었으나 환갑 이후에도 교통사고와 위암수술 등 온갖 시련을 겪는다.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살아온 70년의 화업에서 그가 길어 올린 작품에선 사람의 온기가 묻어난다. 중간 톤의 색감에 단순한 화면으로 구성된 캔버스. 그 속에 가족, 새, 나무와 정자 등 향토적이고 서정적 소재가 조화롭게 자리 잡았다.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모든 것이 어우러진 작품은 향수와 그리움의 미학을 전한다. 가족이나 일상, 그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 절제의 미학에 담긴 추억과 그리움

구순을 넘긴 백영수 화백의 근작 ‘실내’(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구순을 넘긴 백영수 화백의 근작 ‘실내’(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그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작품은 어딘지 친숙하다. 한국문학의 대표적 스테디셀러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표지에 담긴 모자상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전시를 통해 단행본과 잡지의 표지와 삽화 등 1940년대 이후 ‘출판미술’ 분야에 남긴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다. 화가 이중섭이 인사말을 남긴 방명록 등 다양한 자료에선 반세기 전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요즘도 경기 의정부 작업실에서 붓과 씨름하는 노화가는 여전히 현역이다. 전시에선 지난해 완성한 100호 넘는 대작 등 부드럽고 깊이 있는 색조와 온화한 정취를 유지하면서도 더욱 간결해진 구성으로 완성된 신작이 눈길을 붙든다.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듯 단출한 선과 색채로 여백을 살려낸 작품에 지난 시간에 대한 노화백의 추억과 그리움이 스며 있다.

광주=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백영수#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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