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이 스쳐 지나는 것 같았다. 유채꽃 들판이, 제주의 숲과 폭포를 배경으로 색색의 고운 한복이 수놓은 무대는 해외 뮤지컬이 득세하는 국내 공연계에서 친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1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개관작으로 막을 올린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김영수 작·구스타보 자작, 김민정 공동연출)는 1966년 초연한 이래 일곱 번째 프로덕션으로 21세기에 선을 보이며 한국적 소재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원작으로 한 한국 창작뮤지컬의 원조인 이 작품은 제주에 신임목사(박철호)가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목사는 사별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색을 멀리하는 배비장(홍광호)이 못마땅하다. 목사는 다른 비장들 및 방자(임기홍)와 모의해 천하일색 제주기생 애랑(김선영)에게 강직한 배비장을 유혹하라고 제안한다. 배비장은 수포동 폭포에서 목욕하는 애랑의 아리따운 자태에 반한다.
마당놀이나 창극으로 수없이 변주돼온 배비장전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산뜻한 무대(김희수)와 우리 옷의 선과 색의 아름다움을 한껏 펼쳐 보인 의상(유미양)으로 시각적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수포동 폭포 장면은 거대한 꽃과 몽환적인 조명 속에 배비장의 환상을 극대화했다. 비장들의 무지개색 두루마기, 기생들의 화려한 한복과 소박한 전통 해녀복은 전통미의 조화를 보여줬다.
‘호박이 넝쿨째 굴렀네’ ‘상투의 노래’ ‘살짜기 옵서예’ 같은 노래(박용구 작사·최창권 작곡)는 귀에 익숙한 리듬과 선율로 편안하면서도 현대적인 편곡으로 세련되게 다가온다. 전기기타, 드럼이 포함된 14인조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극에 매끄럽게 입힌다.
애랑이 배비장의 전임인 정비장이 떠날 때 그 앞니까지 뽑아내고, 배비장이 방자에게 홀랑 속고 마는 등 장면 장면은 익살스럽고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양반(정확히는 중인이다)의 위선과 이중성을 비웃는 원작의 해학과 풍자보다는 배비장의 순정과 진정한 사랑을 찾는 애랑의 러브 스토리로 바뀌면서 골계미(해학미)가 약해진다. ‘배비장은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는 방자의 말 한마디에 애랑의 마음이 흔들리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해피엔딩을 맞는 전개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헐거워진 이야기는 김선영과 홍광호의 연기와 빼어난 노래가 채운다.
김선영은 교태 넘치는 눈꼬리와 몸짓으로 무대를 장악했고, 홍광호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딕션(발음)과 청명한 목소리로 환호를 이끌어냈다. 방자 역의 임기홍은 또 다른 주역이었다.
3D 매핑으로 영상을 덧입힌 돌하르방은 눈을 깜박이거나 혓바닥을 쏙 내밀어 웃음을 줬지만 기대보다는 단순했고, 배비장 아내의 혼령을 표현한 홀로그램은 평면적이었다. 최신영상기법을 도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관심이 쏠린다. : : i : :
3월 31일까지. 배비장에 최재웅, 신임목사에 송영창, 방자에 김성기가 번갈아 출연한다. 4만4000∼9만9000원. 1588-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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