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싫어요. 선생님 고추를 봤어요.” 순진무구한 다섯 살짜리 여자 유치원생이 원장 선생님에게 말한다. 다른 아이들도 그 남자 유치원 교사의 집 지하실에 갔었다고 거든다. 아이들은 지하실 벽지와 소파 색깔까지 기억하고 있다. 원생들 중에서는 최근 악몽을 꾸거나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는 아이들도 여럿 나왔다. 성추행을 당한 아이들에게서 관찰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물론 교사는 결백을 주장한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질문 하나. 당신이 보기에 이 남자가 실제 성추행을 저질렀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거의 100%에 가깝지 않겠는가. 우선 피해를 당한 아이의 증언이 구체적이다. 게다가 다른 원생들의 입에서도 성추행 가능성을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나.》 의심스러운 정황들
아직도 확신이 안 서는 분들이 계신가.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첫째, 남자는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의 장난을 다 받아줬다. 여자 교사들과 달리 그는 아이들과 몸으로 친밀감을 주고받았다. 끌어안고, 뒹굴고, 레슬링도 함께 했다. 심지어는 대변을 보고 그에게 밑을 닦아 달라는 아이도 있었다. 물론 이런 요구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흔쾌히 들어주곤 했다.
둘째, 처음 남자를 고발한 아이의 아빠는 그의 친구다. 형제보다 더 가까울 정도로 끈끈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친구가 바쁘거나 귀찮아하면 자신이 아이를 유치원으로 데려왔다 집까지 바래다 주기도 했다. 아이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남자를 참 잘 따랐다. 함께 걷는 동안에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가족보다 오히려 남자를 더 좋아했다.
셋째, 남자는 최근 이혼했다. 양육권을 가진 전처는 남자가 아이를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기 위해 아내를 설득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대화를 거부하고 아이를 보내주지 않는 아내 때문에 그는 좌절하고 있었다.
어떤가. 이 세 가지 정보가 남자가 성추행을 저질렀을 거란 확신을 더 강화시켜 주지 않나.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습은 아이들을 성추행하기 위한 구역질 나는 위선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겉으로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유치원 교사지만, 아이들과 나눴던 신체 접촉은 그의 변태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다. 이혼으로 인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제대로 해소할 수 없는 상황과, 자식을 보고 싶은 욕구 등이 결합돼 아동에 대한 성욕이 유발됐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확신의 희생양
‘그 남자’는 덴마크 영화감독 토마스 빈테르베르의 2012년 작 ‘더 헌트(The Hunt)’의 주인공 루카스(마스 미켈센)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전형적인 아동 성추행범이 돼버린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남자가 아이들을 성추행했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확신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론적으로 ‘전형성에 근거한 판단’이 얼마나 틀리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교수(심리학)는 전형성에 근거한 판단을 ‘대표성 추론전략’이라고 했다. 이는 어떤 개인이 특정 집단의 대표적인, 또는 전형적인 모습과 비슷하면 그 사람이 당연히 그 집단에 속할 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루카스의 스토리가 성추행범의 전형적인 모습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간다. 이런 추론전략의 가장 큰 허점은 전형성 외의 다른 중요한 정보는 모두 무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자의 집에는 지하실이 없다. 성추행을 확신하고 물어보는 어른들의 질문(혹시 너를 선생님이 지하실 같은 데로 데려가지 않았니?)이 존재하지도 않던 기억(지하실)을 아이들의 마음에 심은 것이다. 이런 일은 사실 성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일어난다. 일단 지하실이 머릿속에 만들어지면, 아이들은 지하실을 자신만의 모습으로 꾸미게 된다. 그러곤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지하실을 다른 아이들에게 진실인 양 이야기한다. 모든 유치원생의 머리에 존재하지도 않는 지하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른들은 남자의 지하실에 갔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만 주목하고, 실제로 그의 집에 지하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불일치하는 정보는 무시하고, 때론 관련성이 없는 정보를 자신의 판단을 지지하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봤다던 클라라(아니카 베데르코프)의 이야기도 실제로는 거짓말이었다. 클라라도 자신의 거짓말이 불러온 결과를 직감하고 어른들에게 고백한다. 루카스 선생님은 잘못이 없다고.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이제는 다른 애들까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고. 놀라운 것은 클라라의 진실된 고백을 어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클라라의 무의식이 끔찍한 기억을 차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카스가 성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는데도 그 정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보통의 아이들도 갑자기 악몽을 꾸거나 오줌을 싸지만, 어른들은 그런 모습이 루카스의 범죄 사실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판단에 대한 확신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차 강화된다. 확신을 의심하라
루카스는 경찰에서 무혐의로 풀려난다. 하지만 그가 아동 성범죄자라고 확신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의 확신은 한 남자를 ‘사냥감’으로 삼아버린다. 가족보다 더 끈끈한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까지 사냥꾼으로 돌변한다. 남자가 성추행범이 분명하다는 확신은 그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남자를 괴롭히고 사냥하는 것은 악마의 사악함이 아니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마을 사람들의 확신이다.
우리는 확신을 좋아한다. 확신에 찬 리더를 좋아하고 우리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사회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다. 그리고 확신은 의심으로부터 자유롭다. 덕분에 쉽게 진실의 지위를 획득한다. 문제는 확신이 늘 정확한 판단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에 확신은 우리가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불일치하는 정보는 무시한 결과일 확률이 높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신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확신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잘못된 확신 때문에 자살 또는 자살의 언저리까지 내몰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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