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안무가 야마시타 잔이 안무한 안애순무용단의 ‘거기에 쓰여 있다’. 관객은 텍스트와 몸짓의 소통을 경험하게 된다. 강동아트센터 제공
공연장 입구에서 관객은 100쪽짜리 묵직한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객석에 들어섰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책을 뒤적여보지만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쓴 단어와 문장, 노래 가사, 기호, 누군가의 일기 한 대목이 적히거나 아예 텅 빈 페이지들이 파편처럼 흩어지기만 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진행자가 알려주는 페이지를 펼치면 무대 위 무용수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인쇄된 단어는 무용수들의 춤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2, 23일 서울 상일동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에서 열린 현대무용 공연 ‘거기에 쓰여 있다’는 텍스트와 몸짓 사이에 일어나는 소통을 관객이 몸소 체험하게 하는 자리였다.
일본인 안무가 야마시타 잔(43)이 공연의 진행을 맡아 99쪽부터 내림차순으로 책장 오른쪽 상단의 쪽 수를 일본어와 영어로 외쳤다. 86쪽에 적힌 단어는 ‘흔들리다’. 여성 무용수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다. 이어 85쪽의 ‘쓰러지다’라는 단어에서는 흔들리다 못해 결국 바닥으로 쓰러진다. 84쪽에 쓰인 것은 ‘배(船)’. 흔들리다 쓰러지는 똑같은 움직임이지만 관객의 상상 속에는 거대한 파도에 출렁이는 선상의 광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83쪽의 ‘대홍수’라는 단어를 인지하고서는 불어난 물에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장윤정의 ‘어머나’ 가사가 적힌 페이지에서 관객은 수화(手話) 합창단의 ‘소리 없는 노래’를 듣게 된다. 지휘자의 흥에 겨운 몸짓은 고요한 침묵과 상충되지만 관객 역시 속으로 노래를 따라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전체적인 스토리가 없다. 페이지의 키워드가 서로 맞물리는 연관성도 거의 없다. 제시된 단어나 기호가 어떻게 춤으로 표현되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90여 분의 공연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고정관념을 순식간에 튕겨내는 인식의 전복이 순간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다.
‘←’ 기호가 나타난 페이지에서는 무용수들이 잽싸게 무대 왼쪽으로 퇴장하고, ‘달리다’라는 단어에서는 관객의 예상과 달리 슬로 모션으로 느릿느릿 달려간다. 무용수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동작은 비슷하지만 관객은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지갑이…’ ‘벌레가…’ ‘전신에’ ‘화장(化粧)’이라는 단어를 읽고 난 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몸짓을 받아들인다.
2002년 일본 초연 때는 9·11테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지만 이번 한국 공연에서는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바꿨다. 강동아트센터와 안애순무용단, ‘페스티벌 봄’ 공동 제작. 안애순무용단 단원 한상률, 윤보애, 허효선이 출연했다. : : i : :
페스티벌 봄의 프로그램으로 4월 8, 9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 다시 오른다. 오후 8시 반, 2만 원. 02-730-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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