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북 장수군에선 6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굴돼 화제를 모았다. 발굴을 담당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에서 마구 장식과 항아리, 목관 꺾쇠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특이한 건 고분 형태나 출토품이 대다수 가야 양식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백제권역으로 인식되는 전북에서 영남 쪽에 자리한 가야의 문화유적이 나오는 건 상식 밖이다. 당시 이 지역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 백제 틈새를 노린 대가야의 야망인가
학계에서 진안고원이 펼쳐진 전북 진안 장수의 동부 산악지역이 가야 유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6년 발굴 조사에서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이 가야계 ‘돌덧널무덤(석곽묘)’으로 드러난 것. 호남은 백제 또는 마한의 땅이라는 고정관념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변방 들러리로 취급되던 가야가 다른 3국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던 흔적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보면 이 지역은 6가야 가운데 대가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가야 연맹은 초반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위세를 떨쳤지만, 4∼6세기엔 경북 고령에서 출원한 대가야가 맹주로 군림했다. 가야연맹은 신라와 대결하면서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가 전북으로 진출한 결정적 계기는 5세기 초반에 일어났다. 국력이 강성해진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면서다. 예나 지금이나 강은 국가의 주요 교통로. 강이 없으면 외부와의 교역이 불가능하다. 대가야는 낙동강 대신 이 지역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장수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북지역이 곧장 가야 땅으로 편입되진 않았다. 상당한 힘을 지녔던 토착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야도 굳이 복속시키기보단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 교수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형태로 범(汎)가야 연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지만 백제는 왜 가야의 진출을 묵인했을까.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와 겨루느라 여력이 없었다. 백제 입장에서 동부 산악지역은 거리는 가깝지만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에 둘러싸여 직접 통치가 불편했다. 대가야가 일정 지분 보장을 약속해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높다. ○ 독립국가를 꿈꿨던 가야계 소국일 수도
장수 일대가 단순히 가야 영향권에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국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학계에선 장수와 진안을 아우르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는 시각은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 여기서 더 나아가 ‘가야계 소국’이나 ‘장수가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최근 대두하고 있다.
이 지역을 국가로 보는 근거는 엄청난 고분의 양과 규모다. 중대형고분 200여 기가 군집을 이루는 곳은 기존 가야 영역에서도 찾기 힘들다. 왕족이 아니라면 이 정도 무덤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단 설명이다. 고분에서 발견된 ‘꺾쇠’도 이를 뒷받침한다.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목관의 부재인 꺾쇠는 왕실 무덤에서나 발견되는 유물”이라며 “이 정도 규모와 돈을 들인 고분이라면 낮은 단계의 고대국가는 형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봉수(烽燧) 역시 중요한 근거다. 현재까지 이곳 주위에선 모두 42개의 고대 봉수 유적이 확인됐다. 봉수란 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시설로 이 지역 봉수로의 도착지가 장수다. 한 국가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곽 교수는 “장수가야는 세력은 약했을지언정 백두대간 영호남의 핵심 관문인 육십령(六十嶺)을 차지하고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 같다”며 “고구려에 패해 남쪽으로 물러난 백제가 6세기 후반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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