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는 화려한 왕실에서 인형 150개와 장난감 말 30개를 지니고, 식사할 때마다 제복을 갖춰 입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았다. 버릇없이 자랄 법도 한데, 소녀의 친구는 “여왕은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87)의 탄생부터 지난해 즉위 60주년을 기념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을 따라간 전기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전기 작가가 여왕의 주변 인물 250여 명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꼼꼼히 취재했다. 아버지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6세에 왕위를 계승한 여왕이 60년 넘도록 영연방국가의 많은 국민에게서 존경받는 이유는 뭘까.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정치에 간여하지 않고,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여왕의 태도를 가리켜 저자는 ‘겸손의 리더십’이라고 칭한다. 폴 매카트니가 여왕에 대해 “마치 우리들의 엄마 같았다”고 말한 것은 썩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국인에겐 낯선 여왕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여왕이 말 사육과 승마에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지, 남편 필립과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 마거릿 대처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등이 세세하게 쓰여 있다.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에 대해 저자는 “아무도 다이애나만큼 의전 규칙을 무시한 적이 없었고 여왕에게 그렇게 무례할 수 없었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영국 왕실의 상세한 법도를 엿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영국의 전통 티타임인 애프터눈티를 즐기는 여왕의 모습 같은 것. “매일 오후 5시부터 하인이 레이스 천으로 덮은 수레를 끌고 들어오는데 둥글게 썬 얇은 빵에 오이와 달걀 등을 넣어 만든 샌드위치와 케이크, 생강 비스킷과 머핀을 곁들인다. 여왕은 은제 주전자에 얼그레이나 다르질링 찻잎을 넣고 우려낸다. 차를 미지근하게 마시면서 샌드위치 정도만 먹고 케이크는 코기 견(犬)들에게 준다.”
이 책의 띠지에 ‘영국 왕실이 인정한 유일한 공식 전기’라고 쓰여 있는 것은 그럴싸해 보인다. 저자가 영국 왕실의 허락을 받아 여왕과 찰스 왕자를 만나긴 했지만 여왕과 공식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니다. 영국 왕실이 인정한 전기에는 비판과 해학이 없다. 주인공에 대한 존경과 찬사에 치우친 전기가 재미있을 리 없는 법. 지난해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톱을 손질하던 여왕의 모습을 떠올리면, 반듯한 모습 뒤에 숨겨진 반전이 충분히 있을 법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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