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시대다. 소설 시장도 다르지 않다. 대하소설은 고사하고 400쪽 넘는 두툼한 장편을 국내 창작소설 가운데서 찾기 힘들다. 내용 또한 굵직한 서사보다는 이미지의 나열이 앞선 감각적인 소설이 대세다.
이 소설의 문학적 완성도는 일단 제쳐두자. 13년 만에 펴낸 저자의 장편, 650쪽에 달하는 묵직한 두께,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유신, 1987년 민주화 열기, 이후 문민정부 수립까지 이어지는 시대적 배경,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3대에 걸쳐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가족사…. 책장을 펴는 순간 오랜만에 ‘물건’을 만난 듯 긴장했다.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일단 재밌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해 한 편의 정치 야사(野史)를 읽는 듯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건은 두 남자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폭력조직 ‘서의실업’의 행동대장인 선우활과 야당 거물의 아들인 소설가 윤완. 둘은 군대에서 만나 의형제가 된다. 윤완의 아버지가 정계에 입문한 뒤 사업을 하는 윤완의 이모가 서의실업 부하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선우활은 조직을 배신하고 윤완을 돕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선우활은 자신의 오른팔을 잃고, 자신도 조직에 쫓기게 된다.
한 편의 활극처럼 이어지던 이야기는 더 큰 밑그림을 그린다. 여당 편에 서서 골치 아픈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서의실업, 그리고 운동권 비밀결사조직인 ‘아이제나흐’가 첩보전을 방불케 하며 대립을 이룬 것. 이 과정에서 서의실업 회장의 정부였다가 선우활의 애인이 된 남미현이 사실은 아이제나흐의 정보원인 것이 밝혀지며 소설은 탄력을 키운다.
1987년 거셌던 민주화운동이나 3당 합당, 문민정부 출현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의 배경을 다룬 소설은 많다. 하지만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집중하는 대신 당시 정치격변기에서 있을 법했던, 서의실업이나 아이제나흐 같은 조직을 앞세운 정보·테러전을 그려 신선함을 선사한다.
작품은 일제강점기 경찰이었다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던 선우활의 할아버지 선우명, 그리고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월북한 뒤 다시 대남 간첩으로 활동한 선우활의 아버지 선우장의 얘기까지 그린다. 비록 1980, 90년대 이야기보다 긴박감은 떨어지지만 이런 과거사가 밀도 있게 펼쳐지며 장대한 스케일의 소설을 맛보는 즐거움을 준다.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궁금했다. 대체 이 거대한 서사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하고. 결국 마무리는 힘이 달리는 느낌이었다. 선우활의 복수는 급작스러웠고, 개연성도 부족해 보였다. 다른 중요 인물들의 결말도 후일담 형식으로 처리돼 아쉬웠다. 10년 넘게 공을 들인 역작. 작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다 제대로 수습을 하지 못한 모양새다. 좀더 치밀한 후반부를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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