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 1면에 수영복을 갈아입으며 엉덩이를 드러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사진이 게재됐다.
독일 대중지 ‘빌트’는 즉각 “영국이 우리 총리를 조롱하고 있다”는 기사를 지면에 실었고 독일 정부 대변인도 “전통적인 영국의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의 사진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몸짱’ 사진과 성격이 달랐다. 푸틴 대통령의 상반신 노출 사진은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인 반면 메르켈 총리의 사진은 파파라치가 악의적으로 몰래 찍은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남자였더라도 수영복 차림이 놀림거리로 비화됐을까?
여성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외모와 옷차림이 우선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여성 리더는 끊임없이 자신의 ‘여성성’을 어느 정도의 수위로 표현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너무 잘 입으면 사치스럽다 하고, 못 입으면 아줌마 같다고 놀림 받고, 남자처럼 입으면 무섭다고 비판을 받기 쉽다.
이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모든 워킹 우먼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A style은 세계의 여성 정치인들의 옷차림을 분석했다. 여성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여성 리더십이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마침 8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 대처의 핸드백 스타일에 세계가 긴장…
클린턴, 바지에 진주목걸이 자신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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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정치인이다”… 카리스마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의 타조 가죽 가방이 화제가 됐었다. 100만 원이 넘는 국내 브랜드 제품으로 보인다는 누리꾼들의 제보가 발단이 됐다. 가격 논란을 떠나 박 대통령의 가방을 보면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알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든다. 딱 서류가방으로 쓸 수 있는 크기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처럼 핸드백이 화제를 불러 모았던 여성 정치인이 있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 여사(88)다.
대처 여사는 핸드백을 자신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데 활용했다. 맞으면 아플 것 같은 딱딱한 사각형 모양 핸드백을 들었을 뿐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각료들 앞에 나타난 다음 핸드백을 책상에 휙 올려놓은 뒤 좌중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시사 풍자 만화가들은 대처 여사가 각료들을 핸드백으로 때리는 모습을 그릴 정도였다.
실제로 대처 여사의 핸드백 때문에 ‘공격적이다’ 혹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운다’는 뜻의 ‘핸드배깅’이란 신조어가 나왔다. 당시 영국 공무원들은 ‘핸드백당했다(being handbagged)’고 투덜거리며 여성 총리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BBC는 ‘핸드배깅’이 유명해진 사례로 1984년 유럽연합 정상회의를 들었다. 여기서 대처 여사는 책상을 손으로 쾅 내려치며 “영국에 리베이트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 뒤, 유럽연합으로부터 1년에 약 20억 파운드를 받기로 했다. 당시 언론은 “대처 총리가 프랑스와 독일 리더를 핸드백했다(handbagged)”고 전했다.
공격성, 카리스마, 자기주장, 냉전의 상징이 되어온 대처의 핸드백은 결국 경매를 통해 사회에 환원됐다. 200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검은색 악어백은 8만2110파운드(약 1억3500만 원)에 팔린 뒤, 수익금은 유방암 단체에 기부됐다. 2011년 ‘아스프레이’ 핸드백은 경매에서 2만5000파운드(약 4100만 원)에 팔렸다. 대처 여사는 이 돈을 영국의 퇴역 군인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단체인 ‘컴배트스트레스’에 기부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언론은 “핸드백의 이미지에 딱 맞는 기부”라고 평했다. 또 대처 여사의 딸인 캐럴 대처 씨는 “(대처의 핸드백) 낙찰자는 실적이 좋았던 무기(weapon)를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대처 여사가 패션에서 여성성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또 다른 대표 아이콘인 진주목걸이와 리본 블라우스를 보면 알 수 있다. 대처 여사는 “리본은 부드러워 보이면서 예쁘다”고 말해왔다.
영국에 대처 여사가 있다면 미국에는 카리스마 여성 국무장관들이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76)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66)이 대표적이다. 둘 다 힘 있는 목소리와 바지 정장 ‘파워슈트’로 카리스마를 분출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비밀병기’는 브로치였다. 그녀는 200여 개의 브로치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0년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햇살 모양의 브로치를 달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현했다. 옷은 브로치를 돋보이게 해주는 캔버스 같았다. 주로 검은색과 회색 슈트를 즐겨 입었고, 커다란 브로치를 가슴이 아닌 어깨에 가깝게 달아 목걸이와 나란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덕분에 사진을 어떻게 찍혀도 브로치가 항상 등장할 수 있었다.
최근 퇴임한 클린턴 전 장관은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의 여성 정치인이다. 2016년에 차기 대선후보로 나올 것인지 말 것인지, 40년 넘게 쉼 없이 일만 한 여성이 대체 ‘일자리’ 없이 뭘 할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장관은 진화하는 카리스마 패션으로 통한다. 요즘 그의 대통령 부인 시절 사진을 보면 영 딴사람 같다. 그때는 치마를 입고 진주 목걸이와 머리띠를 즐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치 일선에 뛰어든 뒤부터는 오직 바지 정장을 고집했다. 딱히 옷을 잘 입는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밝은 웃음과 파워풀한 목소리, 바지 정장 덕분에 특유의 카리스마가 형성됐다. 지난해 65세 생일을 맞은 뒤부터는 ‘쿨한 여성’의 이미지가 더해졌다는 평도 있다. 선글라스와 블랙베리 덕분이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진은 정치 코미디의 소재가 돼 그녀의 쿨한 이미지를 굳혔다. 타이트하게 조여 맨 머리 끈도 그녀의 카리스마에 일조를 한다.
여성적 매력을 과감히 발산… 패셔니스타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73)의 별명은 ‘아르마니를 입는 좌파’다. 진보적인 공약을 내세우는 민주당 소속 의원이 고급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 격인 아르마니 슈트를 즐겨 입는다며 공화당 측이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이 별명 덕분에 펠로시 의원의 인기가 오히려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살구색 청회색 등 중간색의 의상을 주로 선택하는 것에서도 정치적인 영민함이 드러난다는 분석도 나왔다. 중간색들이 낙태, 동성결혼에 찬성하는 등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그가 지나치게 투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하는 ‘절충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 권 신장과 함께 여성형 비즈니스 슈트를 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아르마니의 의상을 택한 것도 여성 파워를 과시하는 데 좋은 수단이 됐다는 지적이다. 펠로시 의원은 다섯 자녀를 키우며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다 40대 중반 이후 정계에 뛰어든 이력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국민들에게 ‘파워 우먼’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입증해야 했다.
그의 패션 감각은 한국 못지않게 보수적인 워싱턴 정계에서도 새바람을 일으켰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참한 ‘세인트존(St.John)’의 의상을 유니폼처럼 입었던 여성 정치인들이 발렌티노의 오렌지색 스커트 슈트나 화려한 스카프 등을 당당히 착용하고 국회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가 즐겨 착용하는 타히티산 유색 진주목걸이는 미국 여성들 사이에 ‘히트 아이템’이 됐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59) 역시 미국 정관계 패션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패션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독일 비스바덴 육군비행장에서 ‘블랙 패션’을 선보이면서부터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유럽을 순방 중이던 라이스 전 장관은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검정 스커트와 금장 단추 7개가 달린 검은색 코트로 완벽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다. 가느다란 힐이 달린 무릎길이 부츠도 라이스 전 장관의 다리를 길고 섹시해 보이게 하는 데 일조했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유력 언론들이 일제히 그의 패션 감각을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슈트 패션들도 다시 화제가 됐다. ‘세인트존’ ‘베르사체’ ‘아르마니’ 슈트를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무채색 옷을 입을 때도 여밈 부분이나 칼라가 독특한 디자인을 선택하면서 넌지시 ‘패션 본능’을 드러내 왔다. 라이스 전 장관이 ‘성(性)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영민하게 간파해냈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2006년엔 미국의 패션잡지 ‘배니티 페어’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기도 했다.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에 이어 2007년 아르헨티나 헌정 사상 첫 선출직 여성 대통령이 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60)은 남미의 패셔니스타로 꼽힌다. 염색한 붉은 머리, A라인 원피스, 굽 높은 ‘스틸레토 힐’로 완벽한 패션을 선보이는 모습에 ‘남미의 재클린 케네디’, ‘제2의 에비타’라는 별명이 붙었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롤렉스 시계와 크리스티앙 루부탱 하이힐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사치스럽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측은 한 인터뷰에서 “면밀히 들여다보면 아르헨티나 디자이너의 의상이나 구두를 더 즐겨 착용한다”고 항변했다.
아시아에서 패션 감각으로 인기가 높은 여성 수장은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46)다. 정재계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서구적인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밝은 색 머플러를 즐겨 착용한다.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해서도 오렌지색 스카프, 하늘색 리본 블라우스 등으로 여성적인 매력을 과시했다.
‘패셔니스타 여성 총수’들의 공통된 아킬레스건은 ‘패션=사치’로 여기는 부정적인 시선이다. 2011년 발생한 태국 최악의 홍수 사태 때, 250만 원가량 하는 버버리 장화를 신고 나온 친나왓 총리의 모습에 태국 전역이 들끓었다. 당시 태국의 인터넷에서는 “물난리에 웬 명품 신발이냐”는 비난과 “현장으로 바로 뛰어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엇갈렸다. 미국의 라이스 전 장관도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뉴올리언스가 물바다가 됐을 때 뉴욕에서 한가롭게 페라가모 구두를 샀다는 사실이 알려져 구설수에 휘말렸다.
모성이 느껴지는 친근함… 프렌들리
카리스마 여성 정치인들이 패션을 정치적 강인함의 도구로 활용했다면 소탈한 친근함으로 다가가는 이들도 있다. 메르켈 독일 총리(59)가 대표적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래저래 ‘패션 테러리스트’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던 인물 중 하나다. 본인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일하고 싶은데 주변에서 놔두질 않는 스타일. 독일 출신의 샤넬 수석 디자이너인 카를 라거펠트는 “메르켈 총리가 블라우스를 입고, 슈트 단추는 풀었으면 좋겠다”며 “그녀의 전반적인 패션은 그럭저럭이다(OK)”라고 평했다. 취임하자마자 수영복 사진이 영국 언론에 드러났고,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에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었다가 각국 언론이 ‘파격’이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곤혹스러워했다. 부대변인을 통해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노르웨이 왕족보다 자신이 이목을 더 끌었다면 미안하다. 의도한 게 아니다”라고 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스타일을 독일 디자이너 베티나 쇤바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편이다. 버튼 3개 달린 재킷과 정장바지가 그의 대표적인 패션. 네덜란드의 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그녀의 정장 입은 모습의 사진을 모아 분석한 결과, 같은 디자인인 다른 색깔 옷이 50벌 이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르켈 총리의 패션 구설수는 오히려 일반 여성들에게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스페인과 그리스에서는 ‘마녀’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유럽 재정 위기 속에서도 독일을 잘 이끌어온 그의 국정 운용 능력이 그의 2% 부족한 패션 센스를 친근함으로 승화시킨 점이 크다.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52)는 화이트 재킷을 많이 입는 편이다. 중요한 기자간담회나 발표가 있을 때마다 비슷한 디자인의 화이트 재킷을 입었다. 흰색이 그녀의 붉은 머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데다 공식석상에서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서민적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는 게 현지 언론의 평이다.
길라드 총리도 패션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디자이너인 마이클 코어스의 재킷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갔다가 일각에서 ‘호주 디자이너를 홍보해 달라’는 비판을 받은 것. 최근 살을 빼고, 안경을 쓰는 등 부쩍 패션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부 호주 누리꾼은 “우리 총리는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미란다 홉스 같다”라고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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