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오입쟁이’ 위관 이용기 알고보니… 조선가요-요리책 쓴 재야 지식인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3일 03시 00분


신경숙 교수 연구 통해 재조명

이용기가 구전되던 조선가요 1400여 편을 집대성한 ‘악부’(왼쪽)와 한국 최초의 컬러 요리서적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고려대도서관·신경숙 교수 제공
이용기가 구전되던 조선가요 1400여 편을 집대성한 ‘악부’(왼쪽)와 한국 최초의 컬러 요리서적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고려대도서관·신경숙 교수 제공
위관 이용기(韋觀 李用基·1870∼1933?).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위관은 한국사에서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사진 한 장 찾기 힘들 정도로 생소하다. 당시 구전되던 조선가요 1400여 편을 집대성한 ‘악부(樂府)’를 편찬한 인물임에도 별다른 연구조차 없었다.

이용기가 홀대받은 데는 크게 2가지가 작용했다. 일단 ‘오입쟁이’란 낙인이다.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이 악부 원본 첫머리에 남긴 소개 글에 “풍류를 좋아하여 오입쟁이로 일생을 살았다”는 대목을 넣은 탓이다. 현대적 시각에서 바람둥이 날건달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나머지는 첫 이유의 파장이 컸다. 그런 치가 쓴 악부니 당대에도 선입견이 컸을 터. 같은 시기 국립국악원 전신인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가 간행한 ‘조선아악’ ‘가집’ 등을 베낀 서책 정도로 취급했다. 오죽하면 악부에만 실린 가요조차 ‘오입쟁이 격식’이라고 불렀을까.

하지만 최근 이용기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학문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이용기가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재야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여럿 나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조선어사전’ 편찬 활동이다. 계명구락부가 시작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이어받은 조선어사전은 일제의 탄압으로 간행 결실을 보진 못했다. 여기엔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같은 당대 유명 지식인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용기의 이름도 올라있다. 게다가 1930년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선정한 편찬원 5인에도 들어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사전 편찬 사업에 당당히 참여했던 것이다.

의외의 작품에서도 이용기를 만날 수 있다. 1924년 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쓴 이도 이용기였다. 2001년 궁중음식연구원이 한글로 재발간한 이 책은 한국 최초의 도색 요리책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중 음식을 다룬 정조지(鼎俎志)를 뼈대로 서양과 중국 일본 요리법까지 총망라한 역작이다. 음식사 연구자였던 고 이성우 한양대 교수도 “전통음식에 시대의 조류를 융화시켜 온고지신의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신 교수는 이용기의 악부가 아류작이 아니란 사실도 새로이 밝혀냈다. 박성의 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이 집필한 ‘악부연구’(1965년)에 따르면 악부는 이후 일부 추가되긴 했지만 1926년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 아악부의 가집은 그 후에 나왔다. 심지어 조선아악에는 참고 목록에 ‘이용기 악부’가 나온다. 아악부 출판물들이 거꾸로 악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위관이 10여 년을 공들였다는 악부는 독창적인 창작물이었던 셈이다.

세 가지 사례엔 공통분모가 있다. 모두 조선의 고유한 전통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용기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한글, 가요, 음식이란 주제에 천착했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이런 저술 활동을 벌인 지식인을 어찌 오입쟁이 한마디로 단정할 수 있을까. 신 교수는 “노산 이은상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풍속에 해박하고 다양한 이와 호방하게 교류한 이용기의 생애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며 “문화 민족주의가 성장하던 20세기 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재야학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위관 이용기#재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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