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셀리나 지역은 현지인들 사이에 ‘구치 타운’으로 통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유명 패션 브랜드 구치의 본사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본사에는 컬렉션용 샘플이나 VIP를 위한 맞춤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함께 있다. 가장 고급스럽고, 섬세한 공정을 다루다 보니 장인 중에서도 베테랑들만 배치되는 곳이다.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구치’ 디자인의 심장 격인 이 공장을 찾았다. 대표적인 핸드백 모델인 ‘뉴뱀부백’의 제작 과정을 쫓아가며 ‘명품(名品)’이 진짜 ‘명품’이 되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 가죽 선별 및 염색
견학의 첫 코스는 가죽을 선별하는 작업대였다. 악어, 타조, 뱀(python·파이선) 등 최고급 희귀 가죽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수작업이 많았다. 뱀의 해를 맞아 특히 동양권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파이선의 경우 특이한 색을 내려면 일일이 손으로 비늘을 색칠해야 했다. 길이가 8m에 달하는 대형 파이선은 흡사 ‘용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가장 고가인 악어가죽은 특히 무늬가 가지런할수록 질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무늬가 가지런한 배 부분 가죽은 핸드백 몸통에, 돌기가 있는 등 부분은 핸드백 바닥이나 장식 부위에 사용한다. 악어가죽도 종류가 많았다. 무늬가 크고 균일한 것은 미국 미시시피산, 무늬가 작고 두께가 얇은 것은 북아프리카산이었다. 동물의 가죽을 패션 소재로 쓰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점을 의식한 듯 구치 측은 “야생 동식물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따라 연간 허용된 양만큼 포획한다”고 강조했다.
구치는 천연 가죽 외에도 새로운 소재 개발에 힘을 쏟고 있었다. 작업장에 있던 천 중 가장 비싼 제품은 벨벳과 금사로 짠 천. 구치를 상징하는 ‘GG’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공장 관계자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구식 베틀을 사용해 실을 짜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루에 20cm 정도밖에 짜지 못한다”고 전했다.
가죽 재단
귀한 가죽을 낭비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답게 커팅하는 기술은 숙련된 장인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죽 특유의 무늬가 핸드백 모서리에 조화롭게 맞물리기 위해서 핸드백 하나에 악어피 3개가 소요되기도 한다. 천연 가죽 그대로의 상태만으로는 반들반들한 윤기를 내기 어렵다. 물에 담갔다가 쫙 편 뒤 24시간 동안 건조하기도 한다. 이후 집중적으로 열을 가하면 따로 약품을 쓰지 않아도 윤기가 난다는 설명이다.
대나무 핸들 등 액세서리 제작
핸드백 제작 전체 공정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중국산 대나무(뱀부)를 직접 불에 쬐면서 멋지게 구부리고 그을리는 과정이었다. 구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이탈리아가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 패션 소재로 과감히 대나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전통이 되면서 대나무는 구치를 상징하는 대표적 소재가 됐다. 주로 핸드백 손잡이나 여밈 장식에 쓰이는 대나무는 줄기가 아닌 뿌리 부분을 사용한다. 품질이 좋고 대나무 전체를 해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바느질
이렇게 준비된 재료들을 하나의 완성품으로 조립하는 작업대에선 20여 명의 장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평균 20∼25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10∼12시간이 걸리는 뱀부백 1개의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장인들이었다. 작업장 환경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제작 공정은 30년 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모서리 등 주요 부위는 재봉틀 대신 모두 직접 손으로 박음질하기 때문에 손 곳곳에 굳은살이 생겼다.
작업장 내 분위기가 흥겹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각자의 캐리커처를 자신의 작업대 위에 붙여 놓고, 서로 어깨를 다독여 가며 일하고 있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한 땀 한 땀’의 공정을 최대한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 작업장의 총괄팀장인 스테파노 마르실리 씨는 “화려하진 않아도 장인은 정말 보람찬 직업”이라고 말했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제품을 제 손으로 완성해냈을 때의 그 희열이란…. 피렌체 시내를 오가다 제가 작업한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여성을 우연히 만났을 때 짜릿한 느낌이 듭니다.”
▼ 구치박물관, 90여년 명품성장사 한올한올 담아 ▼
2011년 9월 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문을 연 ‘구치 뮤제오’는 구치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브랜드 박물관이다.
1921년 창업자인 구초 구치가 브랜드를 설립할 때 가졌던 꿈과 비전이 9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19일 방문한 구치 무세오는 짜임새 있게 정리된 전시장 구성이 눈길을 끌었다.
먼저 1층의 ‘구치 카페’가 이국에서 온 손님을 반겼다. 피렌체에서 재배한 로컬 식재료 들을 사용한 샐러드와 파스타 등 ‘구치표’ 요리가 호기심을 자아냈다. 카페 옆에 위치한 북스토어는 패션 사진 건축 등 예술 분야 서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었다. 구치 로고 무늬로 만든 설탕, 구치의 아이콘 핸드백을 그려 넣은 달력 등 구치 마니아라면 그저 ‘윈도쇼핑’만 하기엔 한없이 아쉬울 공간이었다.
본격적인 전시 공간은 1층부터 시작됐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구치가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 기여한 ‘제트족(Jet Set)’ 고객들이 들었던 트렁크며 슈트케이스, 액세서리들이 여행을 테마로 전시된 공간. 런던 사보이호텔에서 고객들의 짐을 날랐던 창업자 구치는 이 호텔을 드나드는 부유한 고객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슈트케이스와 여행용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것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2층의 전시 공간에는 구치를 대표하는 디자인 모티브 중 하나인 플로라(꽃무늬) 패턴과 장인 정신의 집약체인 핸드백 코너, 전 세계적인 레드 카펫에서 빛을 발한 이브닝드레스 코너, 희소성이 높은 귀중품들을 전시한 프레셔스 코너 등이 마련됐다.
같은 층에 자리 잡은 ‘모던 아트 스페이스’는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 공간이었다. 기자가 방문한 때에는 마침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인 신디 셔먼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셔먼이 대학을 갓 졸업한 시점인 1970년대 중반에 작업한 것으로 자신의 사진을 수천 장 찍은 뒤 하나의 영상으로 연결한 유머러스한 작품이었다.
3층의 ‘로고마니아’ 전시실에는 ‘GG’ 문양의 구치 모노그램의 변천사가 연대기순으로 전시돼 있었다. 말 그대로 구치의 ‘로고 마니아’들에겐 낙원 같은 공간이 될 터.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박물관 견학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한 브랜드의 역사를 박물관으로 꾸밀 정도로 풍부한 전통을 갖췄다는 것, 이것이 명품을 명품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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