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울’은 띠나 갈대, 수수깡을 엮어 중간중간 대나무를 세워 만든 울타리다. 안으로는 초가 집채가 들여다보였다. 사람으로 치면 속이 훤히 비치는 옷가지를 대충 걸쳐 놓은 격에 가깝다. 그래서 지켜주고 막아줄 수단이 없는 상황을 둘러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집들을 가르면서도 서로 들여다보여 이어주는 물건이다.
서강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도시의 콘크리트 벽과 시멘트 담은 막고 갈라놓기만 하는 악착같은 벽이라고 표현한다. 시골 집 사이의 좁다란 골목인 ‘고샅길’, 남정네들은 타작을 하고 아이들은 놀이터 삼아 뛰어노는 ‘안마당’을 설명하며 함께 어우러지던 옛 공간의 그리움을 표시한다.
책에는 130개가 넘는 사라지는 것들이 나온다. 60년 넘게 국문학과 민속학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제 손으로 만져볼 순 없지만 몸이 또렷하게 기억하는 감각들을 더듬어간다. 눈에 어리고, 코에 서려 그리운 대상과 귀에 자욱하게 남은 공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풀어냈다. 사진작가 이과용 씨가 2년 동안 전국을 살피며 찍은 103장의 사진이 현장감을 더한다.
낙숫물 소리도 사라지는 것으로 분류된다. 집 지붕 아래 서까래를 따라 옆으로 엮인 처마의 끝으로 빗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줄어들자 비가 주는 서정도 덜해지는 듯하다. 요란하게 소란스럽던 도리깨질, 다듬이 소리도 그친 지 오래다.
‘재강’이란 말만 들어도 취기가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술찌끼’라고도 부르는 재강은 막걸리를 걸러내고 남은 찌꺼기다. 간장을 섞어서 양념으로 쓰거나 쌀을 넣고 설탕을 타면 알싸한 죽이 된다. 막걸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요즘 저자는 사라져버린 재강의 맛과 취기를 그리워한다.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는 속담은 아무리 자질구레한 걸 많이 모아본다 해도 귀한 물건 하나를 못 당한다는 뜻이다. 이젠 고욤나무 자체가 보기 힘들다. 고욤은 감나뭇과의 식물에 달리는 열매다. 꼭 새끼 감처럼 보인다. 가을이 되면 노리끼리하게 익고 단맛보다 쓴맛이 강하다. 땡감같이 떨떠름한 고욤을 으깨서 작은 독에서 발효시키면 새콤한 풍미를 냈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쳐다보지 않는 푸른색 감인 ‘청시’는 전에는 소금으로 간을 쳐 짭조름한 맛을 내는 별미였다.
제목은 ‘이젠 없는 것들’이지만 숭늉이나 주막, 장독대와 물레방아 등 드문드문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상도 다룬다.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과 함께 문학에 담긴 사물의 정서를 함께 소개해 깊이를 더했다. ‘주막’을 다룬 대목에서는 옛 주막의 향취를 담은 이용악의 시 ‘전라도 가시내’의 구절이 나오고, ‘물레방아’의 경우 민요 ‘방아타령’과 ‘시용향악보’에 실려 있는 고려속요 ‘상저가(相杵歌)’의 가사에서 방아를 찧으며 인생살이의 시름을 풀던 정서가 더해진다. 귀에 자욱하게 남겨진 소리나 구전 노래, 놀이도 차분하고 정감 가는 필체로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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