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다들 지나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녀 춘향? 21세기에 무슨 열녀 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눈 밝은 관객은 극단의 이름 앞에 멈춰 설 것이다.
극단 성북동비둘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을 1시간 공연 내내 트레드밀(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게 만든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2011년도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을 수상한 극단.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의 여주인공을 온갖 현대적 미디어 속으로 투영한 ‘메디아 온 미디어’로 2012년도 올해의 공연 베스트 7에 오른 극단이다.
그렇다. 제목 속 열녀는 우리에게 익숙한 열녀(烈女)가 아니다. 영어 제목 ‘10 Girls CHOONHYANG’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10명의 여자란 소리다. ‘메디아 온 미디어’에서 그러했듯이 춘향전 속 춘향의 이미지를 해체한 뒤 이를 걸 그룹 ‘소녀시대’에 어울릴 만한 현대 여성의 모습으로 포착한다. 그 키워드는 ‘성(性)’이다.
첫 장면부터 의미심장하다. 탱크톱에 핫팬츠 그리고 하이힐을 신은 여배우가 공연 시작 전 부탁의 말씀을 전하다 돌연 객석 밖에 서있는 여성의 핸드백을 뺏어 들고는 춘화(春畵)의 세계를 논한다. 그와 함께 립스틱, 이어폰, 담배와 라이터, 로션, 선글라스 등 핸드백 속의 평범한 물품들은 순식간에 성적인 메타포를 담뿍 머금은 에로틱한 사물로 변신한다.
그리고 대동소이한 복장의 여성들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춘향전 속 고답적 대사를 읊으며 기상천외의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춘향의 탄생 내력과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다 몽룡과 처음 만나는 장면의 대사는 미인대회에서 부끄러움을 가장해 노골적으로 자기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몽룡과 춘향이 첫날밤 한시로 유희를 나누는 모습은 대걸레 자루를 붓 삼아 사각형의 무대 바닥에 평범한 한자(漢字)를 성적 뉘앙스로 분해하는 파자(破字) 장면으로 패러디된다.
몽룡이 한양으로 떠나면서 이별을 일방 통보하는 장면과 변학도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장면은 이성 간의 레슬링 시합으로, 거지꼴로 나타난 몽룡에게 춘향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주라고 월매에게 부탁하는 장면은 인공호흡법 훈련 장면으로 대체된다. 이때 여배우들은 마치 격투기 라운드 걸이라도 되는 양 라운드를 바꿔가며 등장하고, 상대역이 되는 남배우들은 관객과 함께 객석에 앉아 있다 등장한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관객들도 매 장면이 자신의 의표를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춘향전을 지고지순한 사랑의 고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섹스코드가 다소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춘향전의 원전을 읽어보면 농도 짙은 19금 표현이 넘쳐난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현탁 성북동비둘기 대표는 “춘향은 지조와 절개의 열녀가 아니라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열 가지 판타지를 전부 내포해 충족시킬 수 있는 단 한 명의 여자인 까닭에 사랑받고 기억되고 우러러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열 가지 판타지를 맵다, 대단하다, 사납다, 굳세다, 강하다, 세차다, 빛나다, 불사르다, 아름답다, 밝다는 술어로 풀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10명(정확히는 9명)의 춘향이 동시에 등장해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를 들려주는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이몽룡의 과거 시제였던 ‘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 古今同)’을 원용해 춘향에게 투영된 우리의 환상이야말로 고금동(古今同)임을 설파해냈기 때문이다. 춘향전에 대한 가장 발칙한 공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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