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서울 한복판에 세운 건물들. “치욕의 역사도 남겨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대개는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거됐다. 1995년 경복궁 안의 조선총독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2008년 서울시청도 일부 철거됐다. 이들 건물에 앞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건물이 있었으니 1993년 8월에 철거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옛 청와대 관저)다.
20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총독관저는 1939년에 세워졌다. 일제 말기 총독 세 명이 살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6명의 대통령이 관저와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 하지만 청와대 내에선 이곳이 오래전부터 ‘흉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곳을 거쳐 간 총독이나 대통령의 말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풍수지리학적 지식을 곁들여 관저 건립을 둘러싼 흥미로운 팩션을 완성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관저 터가 과연 명당일까, 흉지일까’ ‘왜 경복궁 밖에 관저가 지어졌을까’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흥미로운 질문으로 가득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서울 남산 왜성대에 총독관저가 있던 1930년대 중반. 총독은 ‘생명의 집을 지어라’는 모친의 편지를 읽고, 새 총독관저 터를 찾는다. 이름 난 지관들을 모아 경복궁 내에서 터를 찾게 한다. 조선 최고의 실력을 가진 김 지관은 고민한다. 제대로 된 명당을 알려주면 지관의 본분은 다하지만 조선 백성의 본분은 저버리게 되는 것. 그는 역시 지관이었던 부친이 앞을 내다보고 남긴 비밀 메모를 발견한다. ‘비책은 경복궁의 금원(禁苑), 금지된 정원이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주문. 그는 이를 토대로 총독관저를 흉지인 경복궁 밖 정원에 짓게 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명당을 찾으려는 총독과 흉지로 유도하려는 김 지관의 두뇌대결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다채로운 풍수지리학 지식이다. 경성(서울)은 여성의 하복부 모양이고, 경복궁은 자궁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는 것. 그 자궁의 가장 핵심인 경복궁 후원 수궁 터가 관저로 적합하다고 김 지관은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지관들은 다른 곳을 추천하고, 총독도 고심한다. 여기에 일본에서 온 풍수사의 이론까지 가세하며 명당에 대한 논리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명당은 결국 지관이나 풍수사의 세 치 혀에서 탄생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싸움이다. 풍수를 둘러싼 숨 가쁜 갑론을박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술술 책장을 넘길 정도로 소설은 재미있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도 많아 마냥 가볍지만도 않다. 무엇보다 이제는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진 총독관저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집중한 작가의 주제 선택이 탁월하다.
다만 책장을 덮고 나면 몇몇 중요 인물이 단지 작가가 소설적 재미를 위해 넣은 소모품처럼 느껴진다. 통역사인 ‘세린’이나 세린을 연모했던 일본 관리 ‘하루키’가 그렇다. 이들이 총독이나 김 지관과는 달리 너무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탓에 작품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