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둔갑시켰다면 로메오 카스텔루치(53)는 ‘똥’을 누고 치우는 과정을 공연과 종교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23, 24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려진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를 통해서다.
제7회 페스티벌 봄 개막작으로 초청된 이 작품은 예수의 대형 초상화가 관객을 마주보는 가운데 펼쳐진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초상화다. 그 시선 아래 새하얀 색 가구로 꾸며진 세트가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다. 왼쪽은 거실, 가운데는 식탁, 오른쪽은 침실이다.
공연의 절반 이상은 치매 걸린 아버지가 기저귀를 찬 채 계속해서 똥을 지리는 것을 정장 차림의 아들이 치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린다. 거실에서 시작된 극사실주의적 묘사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점점 상징적 묘사로 바뀐다. 아들의 정성스러운 뒤치다꺼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기저귀에 반복해 지리는 똥(실제로는 물감)은 불쾌한 냄새마저 동반하다가 침실에서는 플라스틱에 든 갈색 액체로 바뀐다.
결국 절망한 아들은 세트 뒤쪽의 예수 초상화로 달려가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낸다. 그때 예수의 초상화에서 농구공이 튕기는 소리가 반복해 들린다. 아들이 사라지고 농구공을 든 아이가 등장해 초상화를 응시하다가 가방 속에서 수류탄을 꺼내 던지기 시작한다. 아이의 수는 12명까지 불어나고 수류탄은 수백 발로 늘어난다. 아이들이 물러난 뒤 기저귀 바람으로 침실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가로질러 초상화 뒤로 사라진다.
다음 순간 초상화가 투사된 영사막 뒤에서 드릴 소리가 들리고 불꽃이 튀더니 초상화가 사라지고 ‘You are my shepherd(당신은 나의 목자입니다)’라는 영어 문장이 나타난다. 잠시 뒤에는 그 부정어인 ‘not’이 희미하게 점멸한다.
지난해 이 작품이 가톨릭권 국가에서 신성모독 논쟁을 낳았던 이유도 살짝 수긍됐다. 만일 초상화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니라 무함마드(마호메트)였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상상해보라.
하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심오한 가르침을 극단적이고 역설적 형태로 드러냈다고 봐야 한다. 공연 속 아버지가 겪는 치욕은 신의 아들이었던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겪어야 했던 수난(passion)을 일상에 투영한 것이다. 또 아버지의 무력한 배설은 스스로 신성(神性)을 포기했던 예수의 케노시스(kenosis·‘비움’을 뜻하는 헬라어)의 형상화이기도 하다.
만물을 이성의 눈으로만 보는 현대인에게 수난과 비움을 실천한 예수가 공연 속 아버지처럼 무력한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 과연 ‘당신은 나의 목자’라고 똑같은 믿음을 선포할 수 있을까. 예수의 열두 제자처럼 가장 순수한 믿음을 간직한 어린이들조차 전지전능함을 포기한 신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지 않을까.
유럽 최고의 실험극 작가로 꼽히는 카스텔루치의 총체극은 현실과 이념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아폴론적 미(美)의 관점에선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반대로 현실과 이념의 불일치가 초래하는 비탄(eleos)과 전율(phobos)을 통해 획득되는 디오니소스적 자기고양을 뜻하는 숭고(崇高)의 관점에 섰을 때 비로소 체감될 수 있다.
똥(비천)과 신성(숭고)을 병치시킨 이 작품의 탁월함은 이처럼 예술과 종교를 분리하려 한 현대적 우상을 폭발시키고 그 일치를 추구하려 한 데 있다. 카스텔루치는 무대 위에서 드라마가 아니라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없는 신적인 계시의 현현을 뜻하는 에피퍼니(epiphany)의 순간을 창조하려 한다. 이 작품이 만일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바로 이 지점, ‘신의 영역을 넘본 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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