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나온 만화 ‘철인 28호’의 팬입니다. 28호도 시간이 흘러 진화했을 테니, 39호쯤 됐겠다 싶어요. 그래서 저도 온라인에서 닉네임 ‘철인 39호’로 활동해요.(웃음)”
만화와 로봇 장난감 수집가이자 소설가(1982년 등단), 김유정문학촌 부촌장, 춘천시민축구구단 단장, 기업인…. 이처럼 다양한 명함을 가진 이는 김현식 씨(59). 최근 그는 ‘로버트 태권브이 박물관’(경기 용인시)과 만화인 창작촌 ‘철인 39호’(강원 춘천시) 건립도 추진하고 있어 그의 명함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
김 씨의 생업은 고향 춘천에 있는 옥 관련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전무이사다. 가업이다. 1973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학업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주말이면 종로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찾았죠. 이곳에는 1970년대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억누르고 있는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었어요.”
그의 얘기는 꿈처럼 이어졌다. 마치 오래된 영사기의 흑백사진이 덜덜덜 돌아가는 것처럼. “‘명랑’ ‘아리랑’ ‘야담’ 같은 통속 잡지는 거리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더군요. 쓰레기 취급 받던 것을 몇 권씩 꼬박꼬박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나중에는 정기적으로 와서 돈 주고 만화와 잡지를 사가는 청년이 있다는 말이 나돌아 희귀본을 팔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대학 졸업 뒤 회사 일을 위해 춘천에 돌아온 그는 골동품 경매장을 틈틈이 찾아다녔다. ‘코주부’를 그린 김용호 작가가 1949년부터 발행했던 ‘만화뉴스’도 경매품 곁다리로 나온 물건이었다.
‘개벽’ 창간호는 특히 귀한 것이라고 그는 몇 차례나 강조했다. 값어치를 물었더니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돈으로 환산해본 적은 없습니다. 만화책 2권을 1억 원 줄 테니 팔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절했죠.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책도 많아요.”
지금까지 고상영 작가의 ‘마술주머니’(1948년), 국방부 정훈국에서 1951년 발행한 신문 형태의 ‘만화승리’, 반공만화 ‘김일성의 밀실’ 등 지금까지 수집한 희귀본 만화가 5000여 점, 로봇 장난감이 1만여 점이다.
그가 작품을 모으는 것은 소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가 소장한 만화책 200여 점을 추린 ‘20세기 만화대작전’이 4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수집벽은 만화가에 대한 지원으로 옮아갔다. 문 닫은 독서실 지하의 허름한 공간에서 만화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국내 만화 관련 학과가 60개를 넘지만 아쉬운 장면이죠. 만화가들이 잠시라도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창작촌이 필요해요.”
만화를 모으던 청년은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한 나이가 됐지만 솔직했다. “통속! 대중! B급! 음악은 뽕짝, 그림은 춘화(春畵), 책은 성인만화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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