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언덕 위 수도원/니콜라스 판 지음/허유영 옮김/ 254쪽·2만8000원/컬처북스
제목과 달리 책의 주인공은 르코르뷔지에도, 그가 설계한 라투레트 수도원도 아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찍은 호사스러운 비주얼보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성당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 알랭 쿠튀리에 신부(1897∼1954)다.
그는 진부한 교의(敎義)에 빠져 있는 종교를 흔들어 깨우고 발길을 돌리는 신도들을 붙잡기 위해 현대예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프랑스 알프스 산 중턱에 아시 성당을 짓고 가장 핫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얼굴 없는 십자가 조각상 같은 전위적인 예술품으로 꾸며 놓았다. 화가 마티스에게 의뢰해 아담한 성당을 설계하고 낙서 같은 벽화를 그려 넣게도 했다.
보수적인 바티칸과 전통 종교건축에 익숙한 신도들은 ‘이단 건축’이라고 반발했지만 쿠튀리에 신부는 한발 더 나아가 무신론자인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찾아간다. 이 거장은 1955년 프랑스 벨포르에 표고버섯 모양의 롱샹 성당을 빚어냈다. ‘건축의 창세기’를 열었다는 걸작이다. 5년 후엔 평생을 쌓아온 건축 기법을 집대성해 리옹 인근 언덕에 쌓아올린 라투레트 수도원으로 종교건축의 정점을 찍는다. 네모난 콘크리트 수도원은 첨탑의 작은 십자가를 제외하면 전혀 성당스럽지 않지만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건축의 성지가 됐다.
쿠튀리에 신부는 펄쩍 뛰는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사상, 신앙이 다른 예술가들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창작을 통해 우리는 500년 동안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위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쿠튀리에 신부의 열린 시각과 선구안은 21세기 서울에 기어이 시대착오적인 고딕 교회 건물을 세우고야 마는 우리의 안목을 초라하게 만든다. 좋은 건축은 좋은 건축주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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