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외모,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지녔지만 중년의 나이에 연기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연극배우 김영민(왼쪽)과 윤상화가 국립극단의 새 창작극 ‘칼집 속의 아버지’ 연습 현장에서 칼을 맞대는 포즈를 취했다. 칼집 속의 칼을 꺼내기를 항상 주저하는 무사 갈매 역의 김영민은 예의 수세를 취했고, 갈매의 원수인 흑룡강역의 윤상화는 거침없는 공세의 자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연극판에서 남자배우가 가장 힘겨워하는 시기가 40대라고들 한다. 결혼해 가정을 이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극 출연료만으로는 아무래도 힘들다. 그나마 연극 출연작이 1년에 서너 편 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연기자로서 일정 경지에 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런 자신의 스타일마저 허물 수 있는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민(42)과 윤상화(43)는 연극판의 ‘꽃중년’ 배우다. 연극판의 대표적 꽃미남 배우로 불리는 김영민은 주로 귀공자 스타일의 주인공을 도맡아왔다. 대학로에선 “TV나 영화로 가도 먹힐 외모”라는 평가가 많았다. 실제 ‘베토벤 바이러스’와 ‘더 킹 투 하츠’ 같은 TV 드라마에서도 이런 면모를 보여줬다. 워낙 동안이라 20대 배역도 소화하던 그는 지난해 ‘M. Butterfly’에서 여장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프랑스 외교관 르네 갈리마르 역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여심을 뺏었다.
윤상화는 그와 대조적 의미의 ‘꽃중년’이다. 무대 어디에 숨어 있든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독특한 외모를 지닌 배우다. 번역극보다는 주로 창작극에서 캐릭터 강한 배역을 맡았던 그에게 지난해는 최고의 해였다. ‘그게 아닌데’ ‘목란언니’ ‘뻘’ ‘햄릿6’ ‘늘근도둑이야기’ ‘채상 하나씨’ ‘1동28번지 차숙이네’까지 7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이 중 ‘그게 아닌데’에서 강박증세가 있는 코끼리 조련사 역할로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휩쓸었다.
그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다. 26일∼5월 12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오를 창작극 ‘칼집 속에 아버지’(고연옥 작, 강량원 연출)를 통해서다. 무림고수였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 강호를 떠도는 무사라는 전형적 무협지의 구도를 빌려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그려낸 작품이다. 김영민은 칼집에서 칼을 뽑지 못하는 슬픈 무사 갈매 역을 맡았고, 윤상화는 갈매의 실제 원수이면서 그의 삶의 길잡이이자 극의 안내자인 흑룡강으로 출연한다.
“전 바보처럼 착하거나 아주 악하거나 둘 중 하나를 주로 연기해왔죠. 반면 영민 씨를 만나 함께 작업해 보니까 정말 영혼이 맑고 순수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윤상화)
“상화 선배를 가까이서 지켜보니까 정말 대사 하나 연기 하나까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배우더군요. 몸도 너무 유연해서 배우로서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김영민)
두 사람은 의외로 공통점이 많았다. 놀랍게도 둘 다 햄릿과 ‘에쿠우스’의 앨런 역을 맡았다. 윤상화는 1992년 극단 마산의 ‘에쿠우스’에서 앨런 역으로 데뷔했고, 지난해 기국서 연출의 ‘햄릿6’에서 햄릿 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김영민은 2004년 이성열 연출의 ‘햄릿’, 2005년 김광보 연출의 ‘에쿠우스’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래도 많이 다르죠. 제가 맡은 배역은 장난꾸러기 앨런, 노동자 햄릿이고 영민이가 맡은 배역은 원작 캐릭터에 가깝고….”(윤)
“이렇게 액션 장면 많은 연극을, 그것도 나이 마흔 넘어 처음 출연하는 것도 같아요. 벌써 두 달째 검도 연습을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전 중간에 잠깐 영화 촬영할 때 A4용지 한 장 드는 장면에서 팔이 부들부들 떨려서 NG를 낸걸요.”(김)
두 사람 모두 중년의 고비를 겪었다. 김영민은 “넌 너무 연기가 착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게 힘들었고, 윤상화는 2007∼2008년 10개월간 한 편의 출연 제의도 받지 못해 막막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극복하는 방식은 달랐다.
김영민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든 내가 해낼 수 있는 걸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연출가의 주문에 최대한 충실하게 부응한다. 반면 윤상화는 “아니다” 싶으면 치열한 토론도 불사하지만 일단 납득이 되면 연출가의 기대 이상의 뭔가를 끌어낸다. 전자가 피학적 연기라면 후자는 가학적 연기라고 해야 할까. 칼집에서 칼을 뽑기 싫어하는 무사 갈매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원수의 인생 스승을 자처하는 흑룡강과 묘하게 닮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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