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마고사키 우케루 지음/양기호 옮김
392쪽·1만8000원/메디치
일본에서 ‘반미(反美)’는 한국에서보다 더 심한 금기어였다. 일본 외무성에서 36년간 근무한 고위 관리이자 자위대 사관학교인 방위대 교수를 지낸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래서 큰 논란을 낳았다. 1945년 패전 후 현대 일본사를 미국에 대한 자주파와 친미파 간의 대립 구도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고 주장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일본 열도를 소련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는 ‘불침항모(不沈航母)’로 만들겠다”고 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이라크전쟁에 자위대를 파견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대표적인 대미 추종 그룹으로 재임기간도 길었다. 반면 패전 처리비 삭감(이시바시 단잔 총리), 소련과의 국교 회복(하토야마 이치로 총리), 중일 국교 정상화(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주장 같은 대미 자주 노선을 걸어 온 인사들은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각종 스캔들로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일본 내 자주파를 친미파로 바꾸는 시스템이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도구가 검찰과 언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령 미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잘 만나주지 않고 주요 언론이 이를 문제 삼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정권 유지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동북아시아 영토분쟁의 배경에도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분할과 통치(divide and rule)’라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점령국이 철수할 때 식민지 국가가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곤 했는데, 일본이 러시아 중국 한국과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원인도 미국의 의도적 조작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전직 외교관이 수많은 외교문서와 자료를 토대로 썼다고 하지만 책은 다분히 음모론적이다. 실제 아사히신문은 ‘전형적인 음모사관’이란 서평을 싣기도 했다. 대미 외교에서 일본의 국익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주변국의 국익을 배려하는 시각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런데 이 책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사실이다. 패망 후 3일째 되던 날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내무성 하시모토 경비국장은 각 지방 지사에 점령군(미군)을 위한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8월 27일 오모리에서 문을 연 위안부 시설에는 1360명의 위안부가 모였다.
저자는 “역사상 패전국은 많다. 점령군을 위한 위안부가 거리에 출몰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치안 총책임자인 내무성 경비국장, 혹은 나중에 총리까지 된 국가의 핵심인물이 솔선해서 점령군을 위한 위안시설을 만든 나라가 과연 있을까”라고 묻는다.
일본 정부가 종전 후에도 국가 차원에서 위안소를 만들었는데, 전시에 운영했던 위안부가 ‘민간 매춘업’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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