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인상파 그림만을 보고 반 고흐를 판단해선 안 되고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만 보고 피카소를 판단해선 안 된다. 두 화가가 젊은 날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거의 사진을 방불케 할 정도의 정밀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런 그림은 사진이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왔기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조를 개척한 것이다.
윌리엄 포사이스의 춤도 마찬가지다. 그가 요즘 안무한 복잡다단하고 난해한 춤만 보고 그를 판단해선 안 된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다 열일곱 살에 발레에 입문했다. 뛰어난 재능으로 197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발레리노로 발탁된 뒤 놀라운 안무 솜씨로 4년 만에 상임안무가가 됐고 1984년부터 근 20년간 프랑크푸르트 발레단 예술감독이 됐다. 고전발레와 모던발레의 정통 코스를 거치고 난 뒤 비로소 정통발레를 해체하고 이를 현대무용으로 재구성한 ‘무용의 큐비즘’에 도전했다는 소리다.
10∼14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헤테로토피아’는 그런 포사이스의 최근 대표작 중 하나라는 점에서 공연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20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대작임에도 매회 관객 수를 300명으로 제한한 이 작품은 티켓 가격이 9만 원이나 됐지만 전석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본 관객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은 벽으로 차단된 두 개의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이질적 춤으로 구성됐다. 관객은 두 공간의 춤을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양쪽 공간을 오가며 서로 다른 춤을 봐야 한다.
입장한 관객의 왼편 공간은 듬성듬성 빈 공간을 제외하곤 테이블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그 위엔 무작위로 조합된 알파벳 단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무용수들은 그 테이블 위 또는 아래에서 개별적으로 원시적인 몸짓과 괴성을 질러댄다. 반대로 오른편 공간은 오르간과 매트가 깔려 있고 왼편 공간의 음향이 마이크로 전달된다. 그 음향에 맞춰 이뤄지는 오른편 공간의 춤 역시 정형화된 춤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어우러진 좀더 고난도의 춤이 펼쳐진다.
어느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관람하려다 보면 작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양쪽을 계속 넘나들다 보면 혜안이 생긴다. 왼쪽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자연=무의식=광기’의 공간이다. 반면 오른쪽은 그것을 나름 인간적 잣대로 포착한 ‘문명=의식=질서’의 공간이다. 전자가 카오스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코스모스의 공간이다.
이는 카오스 공간의 음향에 맞춰 남녀 무용수에게 우스꽝스러운 춤을 지도하던 코스모스 공간의 양복쟁이 남성을 통해 분명히 형상화된다. 그는 카오스의 공간으로 이동한 뒤에는 무질서하게 배치된 알파벳의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마이크에 담아내며 일정한 패턴을 읽어내려 한다.
이 작품은 이런 이분법적 구조를 담아내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번역되는 과정의 우스꽝스러운 자의성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그것은 통제 불가의 자연 대 질서정연한 문명, 섬뜩한 무의식 대 합리적 의식, 위험한 광기 대 안전한 질서의 이분법적 폭력성을 맹비판한 미셸 푸코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춤에 대한 자연스러운 본성을 인위적 틀로 묶어두려는 고전발레에 대한 야유로도 이어진다.
70분의 공연이 끝날 무렵 두 개의 공간이 카오스의 공간 하나로 합쳐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의 원칙으로 일원화된 ‘호모토피아’에 맞서 서로 다른 요소들이 공존하고 중첩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푸코의 개념을 작품 제목으로 끌고 온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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