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딸은 사범대학교 4학년이었다. 교생 실습을 나갔다. 그때 알았다. ‘교사는 내 길이 아니다.’ 졸업과 함께 택한 곳은 영화사였다. 엄마는 딸이 택한 길이기에 응원을 보냈다. 그래도 가끔 궁금했다.
“연희야, 너 한 달에 얼마 버니?”
“한 60만 원? 그러는 엄마는요?”
“음…. 너보다 20, 30배는 버는 것 같은데?”
“네?”
거짓말일 리는 없었을 터. 그래도 별로 믿기지는 않았다. 2003년 딸은 영화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었다. 쉬면서 엄마 일을 도와줬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정리했다. 엄마의 통장 정리도 했다. 두 눈으로 확인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보험설계사가 바로 옆에 있었다.
펄펄 나는 엄마, 꿈을 쫓던 딸
‘억’ 소리 나는 엄마는 삼성화재 보험설계사 홍덕남 씨(61)다. ‘헉’ 소리 냈던 딸은 박연희 씨(37)다. 엄마는 스물아홉 살 때부터 보험 영업에 뛰어든 베테랑. 첫째 딸 박 씨와, 둘째 딸, 막내아들을 키우면서 잠시 쉬기도 했다. 자녀 셋을 키우기가 경제적으로 벅찼던 1996년, 엄마는 다시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그때 택한 곳이 삼성화재다.
목표가 뚜렷했던 만큼 엄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주말에도 일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엄마 표정이 밝으니 아이들의 표정도 엄마를 닮아갔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면 아이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때마다 엄마가 강조했던 건 적극적인 자세였다. 뭐든지 ‘한번 해보라’며 격려했다.
2003년 엄마의 통장을 보며 놀랐던 딸. 그때가 처음이었다. 보험설계사란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남들이 흔히 말하는 보험 아줌마, 이게 다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언젠가는 나도 엄마처럼 보험설계사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딸은 여전히 영화가 좋았다. 딸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영화제 기획사에서 일했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는 딸을 한결같이 응원했다. 일도 한결같이 열심히 하면서.
딸은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다시 일을 그만뒀다. 두 아들을 키우느라 정신없다가도 문득 고민이 들었다. 일을 하고 싶었다.
“여전히 펄펄 나는 엄마를 보며 보험설계사를 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졌어요. 그때 고민했던 건 엄마처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가슴 떨리던 첫 출근, 엄마와 함께
지난해 6월 엄마와 딸은 함께 출근을 했다. 딸에게는 보험설계사로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딸은 “엄마가 쌓아놓은 이미지를 훼손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많이 떨렸다”고 말했다.
딸보다 설렌 건 엄마였다. 언젠가부터 자식 중 한 명은 보험설계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삼성화재에서는 2010년 1월부터 ‘가업승계’ 제도를 시작했다. 자녀가 부모가 관리하던 고객들을 이어 받아 관리하는 것. 엄마와 정을 나눈 1200여 명의 고객들을 딸이 이어서 정을 나누는 장면은 퍽 괜찮은 상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설렘을 감췄다. 딸에게 “쉽게 크면 안 된다”고 수시로 말했다. “기본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다”고 혹독하게 말했다. 또 엄마는 딸이 고객을 만나고 오면 꼬치꼬치 캐물었다. 누구를 만났고, 무슨 말을 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만날 건지. 오늘은 고객을 몇 명을 만났고, 왜 그것밖에 못 만났고, 내일은 몇 명을 만날 건지.
딸의 눈에 회사 선배로서 엄마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쉽게 나태해지기도 하는 다른 동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딸도 피곤한 날이면 아침에 지점으로 나왔다가 그냥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엄마는 단 하루도 그렇지 않았다. 근무하는 동안 무섭도록 집중했다. 고객이 1000명도 넘는 엄마. 좀 편하게 영업해도 뭐랄 사람이 없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발품을 팔았다.
“아는 사람 소개로 쉽게 보험 계약 따낼 수도 있죠. 하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영업을 해봐야 배우는 게 많아요. 진정한 영업은 전혀 모르던 사람을 오직 보험을 통해 만나 신뢰를 쌓는 겁니다.”
강한 엄마, 더 강한 딸
엄마는 친한 고객을 만날 때 종종 딸을 데리고 간다. 엄마는 웃으면서 “이제 저 은퇴하면 우리 딸이 고객님 책임질 거예요”라고 말했다. 고객들은 “그럼 나야 안심되고 좋지”라며 웃었다. 모녀가 기대한 반응도 그런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어떤 고객은 “난 계속 언니(엄마 보험설계사)가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언니 관두면, 언니 딸 말고 다른 보험설계사로 바꿔달라고 할 거야”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럴 때 엄마는 딸에게 괜스레 미안하다. 딸은 웃는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아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저도 제 발로 뛰어서 성과를 얻고 싶지, 벌써부터 엄마한테 의존하고 싶지 않거든요.”
엄마의 빛은 때론 딸에게 부담이 되기도 한다. 딸은 보험 영업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꽤 성과가 좋다. 그럴 때마다 일부에서는 ‘엄마가 도와줬을 거야’라는 시선을 보낸다. 또 “넌 나중에 엄마 고객을 이어 받으면 되니 걱정 없겠다”라는 질투 섞인 말도 들려온다. 정작 모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우리 딸은 남을 배려하는 게 타고 났어요. 보험 영업을 하기에는 제격이죠.”
“엄마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천천히 가더라도 꼭 정상까지 갈 거거든요. 엄마처럼.”
사실 엄마가 딸을 많이 도와줬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엄마는 딸에게 수십 년 동안 기본을 가르쳐왔다.
▼ 삼성화재 가업승계 제도, 부모의 고객 기반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 ▼
삼성화재가 2010년 1월부터 시행 중인 가업승계 제도는 오랫동안 활동한 보험설계사가 자신의 고객과 계약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자녀 보험설계사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가 닦아 놓은 고객 기반을 바탕으로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영업을 할 수 있다.
가업승계가 이뤄지려면 부모 보험설계사는 삼성화재에서 55세 이상으로 10년 이상 활동한 사람이어야 한다. 본인이 성사시킨 보험 계약을 통해 들어오는 보험료가 연 3000만 원이 넘어야 하는 것도 조건이다. 보험 계약을 승계 받고자 하는 자녀 보험설계사는 25세 이상이어야 한다. 부모 설계사의 아들, 딸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에게 승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신인’ 보험설계사가 되자마자 부모의 고객을 이어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녀 보험설계사는 설계사로 등록한 후 최소 1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한다. 1년이 지나면서부터 부모 보험설계사는 자신의 고객을 자녀에게 넘겨줄 수 있다. 부모 설계사가 최종적으로 일을 그만 두면 승계는 마무리 된다.
가업승계 제도는 여러 모로 장점이 많다. 자녀 설계사는 부모의 영업 전략을 자세히 보고 배우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고객들도 자신을 관리하던 설계사의 자녀와 관계를 이어가기 때문에 한층 안심이 된다. 보험설계사가 급작스레 일을 그만두거나 회사를 옮기면서 관리를 제대로 못 받게 되는 이른바 ‘고아 계약’은 보험 업계의 오랜 문제였다. 설계사와 고객이 탄탄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회사에도 큰 이익이다.
현재 삼성화재에서는 200여 쌍의 부모·자녀 보험설계사가 함께 활동 중이다. 부모 설계사가 은퇴하면서 가업승계가 마무리된 경우도 10여 건에 달한다. 보험설계사에 대한 젊은층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뀔수록 보험 가업승계는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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