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그는 농사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그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예술가로서 송강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같은 아름다운 가사작품을 지은 명문장가로 기억된다. 하지만 정치가로서 송강은 피바람을 몰고 다닌 숙청의 화신이었다.
지난주 시작된 서울연극제 초청작 ‘일지춘심을 두견이 알랴’(김태수 작, 차태호 연출)는 바로 이 문제적 인간, 송강의 내면을 파고든 연극이다. 김태수 작가의 역작으로 2005년 옥랑희곡상을 수상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에 무대화됐다.
연극의 출발점은 장년의 송강이 동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남 담양에 낙향해 지내던 시절에서 시작한다. 한때 그를 “백관 중의 독수리, 대궐의 맹호”라 불렀던 선조의 변심에 상심한 송강(김태훈)은 술독에 빠져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처럼 가사에 능숙한 시골 선비 정다헌(조영진)을 만나 의기투합한다.
두 사람은 돌아가며 가사를 지을 때는 지음지기(知音知己)가 따로 없지만 화제가 정치로 옮아가면 충돌이 발생한다. 송강은 정치를 정의의 실현이라 믿는 이념의 정치가이면서도 그 정의는 힘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현실 정치인이다. 반면 다헌은 백성의 뜻을 바람 삼아 이견을 조정하는 조화의 예술로서 정치를 신봉한다.
다헌은 하룻밤 우정을 나눈 송강에게 “큰바람 몰고 조정에 들어갈 운세”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반신반의하던 송강에게 정여립 역모사건에 동인이 연루됐다는 증좌가 들어온다. 급거 상경한 송강은 선조의 마음을 뒤흔들어 우의정에 제수되며 화려한 컴백에 성공한다. 이후 서인의 영수가 된 송강의 정치 역정이 굽이칠 때마다 다헌이 나타나 ‘정치가로서 선비’(송강·일지춘심)와 ‘선비로서 정치가’(다헌·두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펼쳐진다.
송강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다헌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한다. 다헌은 젊은 날 자신이 그토록 흠모했던 ‘상춘곡’(조선 최초의 가사)의 저자 정극인(1401∼1481)의 혼령이었다. “홍진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살아가는 내 모습 어떠한가/세상에 남자로 태어나 나만 한 사람 또 있을까.” 송강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읊었던 이 구절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송강의 내면세계를 파고들다 같은 호남 출신인 정극인의 영향을 발견하고 송강의 알터 에고(또 다른 자아)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문학 텍스트를 절묘하게 섞어 귀가 즐거운 대사를 엮어냈다. 커다란 보름달과 연계된 회전무대, 그리고 정철과 정극인의 가사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나비를 형상화한 여성 캐릭터의 춤은 시각적 재미를 안겨준다. 하지만 조선 왕조 최초의 서얼 출신 왕이었던 선조의 열등감과 송강의 자만심이 공명하며 증폭시킨 정치참극에 대한 반성이 빠진 점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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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만5000∼5만 원. 0505-89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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