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서강대 이사장에서 퇴임한 예수회 유시찬 신부(59)의 세례명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다. 보나벤투라(1221∼1274)는 이탈리아 신학자이자 교황을 배출한 프란치스코회 총원장으로 수도회 정비에 힘쓴 가톨릭 성인.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에세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최근 출간한 유 신부를 19일 경기 양평군 두물머리의 한 기도처에서 만났다. 그는 세례명의 라틴어 의미가 “Good things will come(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이라고 했다.
공교롭다. 그가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한 에세이를 낸 것이나 세례명의 뜻, 그의 삶이 겹쳐져서다. 일찍이 법관의 꿈을 꾼 그는 부산고와 서울대 신문학과, 고려대 법대 대학원을 나왔다. 수차례의 고시 낙방 끝에 호구지책으로 법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도 고시 공부를 계속했다.
“신부가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공부는 잘했고, 법이 적성에 맞으니 법관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유 신부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그 역시 군에서 제대할 무렵 접한 개신교 신앙에 끌려 1980년대 초반 당시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에게서 세례까지 받았다. 그는 “제가 계속 교회 다녔으면 고려대에 소망교회, 영남 출신의 완벽한 ‘고소영’”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운명이란 게 있을까? 1987년 강릉법원 산하 동해등기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여직원이 근무 시간에 책에 빠져 있는 게 못마땅해 잔소리를 하며 책을 낚아챘다. 잠시 뒤 자리에 앉아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들쳐보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해인 수녀님의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였어요. 저는 술 담배에 찌들어 새카만 상태의 영혼인데 그 책에서 흠이 하나도 없는 하얀 영혼을 발견했어요. 운명? 어쨌든 저는 가톨릭이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낀 겁니다.”
그는 인근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예비 수도자 모임을 거쳐 1990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일본 유학을 포함해 7년의 신학 공부 뒤 43세 때인 1997년 사제품을 받았다.
어머니는 4남 1녀 중 장남이 신부가 된 뒤에도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해요. 저와 나머지 자식 넷을 안 바꾼다고 했어요. 또 ‘내는 뭐꼬, 30년 넘게 불교 믿다 아들 따라 교회 갔다 다시 성당에 나가는데, 이제는 아예 신부가 된다?’고요. 허허.”
어머니는 노년에 아들이 인연이 많던 병원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그제야 “신부 아들 덕 좀 본다”며 웃음 짓다 세상을 떴다.
너무 출발이 늦은 것은 아니었을까? “인생이란 시간표에서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과 학벌 같은 겉으로 드러난 게 아니라 자신에게 정말 행복과 평화를 줄 ‘마음의 스펙’을 쌓는 겁니다.”
늦깎이로 돌고 돌아 길을 찾은 유 신부의 글은 한껏 열려 있다. “사랑이란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마음공부이며 수행입니다. … ‘중용’에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존덕성은 마음공부를, 도문학은 지식공부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책에는 가톨릭뿐 아니라 불교적 표현, 그가 동양고전 독서를 통해 체화한 노장사상과 성리학 이론까지 등장한다. 이래도 될까?
“예수와 부처, 공자가 한자리에 모였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고수(高手)들이라 유머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을 거예요. 나무 위를 보면 가지와 줄기, 꽃, 열매로 달라 보이고 서로 다르다고 고함치지만 아래를 보면 한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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