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시인(55)은 이색 기록을 갖고 있다. 1984년 등단해 지금까지 시집 11권을 내면서 모두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 시 해설집 3권도 마찬가지다. 일부 대형 문학 출판사에 원고 쏠림이 심하고, 출간을 위해 길게는 몇 년씩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는 ‘마이 웨이’를 외친다.
23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은 “난 출판계의 노마드(유목민)”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전 (출판사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책은 내준다는 곳에서 바로 내야죠. 한 대형 출판사에 가서는 ‘반년 만에 안 내주면 (원고를) 다른 데 들고 가겠다’고 말했더니 석 달 만에 나오데요. 허허.”
올해 등단 30년을 맞은 시인은 4년 만에 나온 11번째 시집 ‘방!’(서정시학)의 ‘시인의 말’에 “어느새 시력(詩歷) 서른 해에 닿았다. 시인 30년이라니!”라고 썼다. 마지막 느낌표의 의미가 무엇인가 물었더니 “세월 참 빠르다는 뜻”이란다. “보통 등단 후 10년까지는 젊은 시인, 20년까지는 중견 시인, 30년까지는 중진 시인, 30년 넘어가면 원로란 소리를 듣지요. 제가 벌써 원로라니. 등단 50년은 넘어야 원로 같은데….”
그는 해를 넘길수록 시가 짧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시가 독자를 점차 잃는 것도 길고 난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반성에서 나온 변화다. ‘방!’이라고 압축한 시집 제목도 그렇다. 시집에는 울주군 은현리에 있는 집필실 얘기, 평소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고래 얘기, 요새 자주 찾는 지리산의 자연을 노래한 시 81편이 실렸다.
‘두루 삼십 리가 되는 황금빛 악양 들판 빠져 나오는데/청 터진 지리산이 밀어올린 잘 익은 보름달 떠오른다.’(시 ‘절창’ 전문)
30년 동안 2000여 편의 시를 썼고, 절반은 시집으로 엮었다는 정 시인. 그는 ‘다작 시인’으로 불리는 게 제일 못마땅하다고 했다. “시인이 뭡니까. 시 쓰는 사람 아닙니까. 시로 꾸준히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죠. 앞으로도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서정시학에서는 정수자 시조시인(58)의 시조집 ‘탐하다’와 서상만 시인(72)의 시집 ‘적소(謫所)’도 출간됐다. 정 시조시인은 “압축미와 간결미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미학적 가치를 시조 형식을 통해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서 시인은 “적소(죄인이 귀양살이 하는 곳)는 시인이 머무는 곳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딘가 입실해야 하는 고독한 병실이기도 하다. 적소에서 건져낸 것들을 시집에 담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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