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도산서원을 노닐며 도산별시를 추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6일 03시 00분


정조 탕평책 상징 ‘도산별과’ 첫 재현

도산별과 재현 행사에 앞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퇴계에게 행사를 알리는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자주색 관복을 입은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이 고유제를 주관하는 헌관으로 나섰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도산별과 재현 행사에 앞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퇴계에게 행사를 알리는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자주색 관복을 입은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이 고유제를 주관하는 헌관으로 나섰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봄꽃이 흐드러지고 햇살은 눈부신 4일 오전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 앞마당에 도포와 유건을 차려입은 전국의 한시 동호인 100여 명이 시험을 치러 모여들었다. 같은 시간 퇴계 이황의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 내 상덕사에서는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이 주관하고 30여 명의 제관이 참석한 가운데 고유제가 열렸다.

금관에 자주색 관복을 갖춰 입은 김 원장이 헌관 역할을 맡아 향을 피우자 한 제관이 퇴계에게 이번 행사를 알리는 말씀을 읊었다. 이어 퇴계의 위패를 향해 다함께 절을 한 뒤에야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됐다. 안동시가 주최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한 도산별과 재현 행사다. 안동에서 매년 ‘도산별시’라는 이름으로 전국한시백일장을 열어왔으나 20회를 맞는 이날은 최초로 옛 도산별과 의식을 그대로 재현한 백일장이 열렸다.

도산별과는 정확히 221년 전 이날인 1792년 음력 3월 25일 정조의 특명에 따라 도산서원에서 실시된 과거(科擧)였다. 별과란 초시(初試·1차 시험), 회시(會試·2차 시험), 전시(殿試·임금이 등수를 매기는 최종 시험)로 구성된 대과(大科·3년에 한 번 치르는 정규시험)와 달리 초시와 회시를 통합한 특별 시험이다. 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임금이 특명을 내리면 열리곤 했는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국에서 온 한시 동호인 100여 명이 221년 전과 똑같이 실시된 도산별과에서 도포와 유건 차림으로 한 시 짓는 시험을 치르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전국에서 온 한시 동호인 100여 명이 221년 전과 똑같이 실시된 도산별과에서 도포와 유건 차림으로 한 시 짓는 시험을 치르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며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정조가 한양이 아닌 영남의 도산서원에서 별과를 실시한 데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이날 ‘도산별과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주제로 강연한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정조는 숙종대 이후 중앙정계에서 축출당한 영남 남인세력을 다독여 탕평정국을 이루고, 영남 학문의 상징인 퇴계학을 국가적으로 진흥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말했다. 특히 퇴계는 당파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퇴계의 얼이 깃든 도산서원은 시험장소로 그만이었다.

221년 전 도산서원 앞 소나무 숲에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경상도 유생 7228명이 응시했고 최종 답안지 3632장이 제출됐다. 그 소나무 숲은 댐 건설로 수몰되어 이날 행사는 대신 도산서원 앞마당에서 치렀다. 고유제가 끝난 뒤 관악기와 타악기를 갖춘 취타대를 앞세우고 파발 행렬이 들어왔다. 파발 대장이 어제(御題·임금이 낸 글제·김병일 원장이 대신 출제)를 꺼내자 권영세 안동시장이 이를 건네받아 펼쳤다. ‘춘일유도산억별시(春日遊陶山憶別試)’, 즉 ‘봄날에 도산에 노닐며 도산별시를 추억하다’라는 제목으로 7언 율시를 지으라는 과제였다. 이윽고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돗자리에 앉은 응시생 100여 명은 한복을 가다듬고 먹과 붓이 아닌 펜으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시간 반의 답안작성 시간이 끝난 뒤 심사를 거쳐 대과 급제자 수와 같은 33명이 상을 받았다. 장원의 영광은 김호철 씨(57·경북 영주)에게 돌아갔다.

김 원장은 “정조는 영남의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오늘날 화두이기도 한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도산별과를 실시했다”며 “국민통합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도산서원에서 퇴계가 몸소 실천한 배려의 삶을 되새기고자 도산별과 재현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안동=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도산서원#도산별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