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잉마르 베리만 영화를 무대에 올린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
“내 다른 모든 영화는 흑백영화여도 상관없지만 단 하나 이 작품만은 컬러영화여야 한다.”
20세기 예술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웨덴 출신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이 이렇게 말한 영화가 ‘외침과 속삭임’(1972년)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이 컬러여야 하는 이유는 주요 배경인 저택 내부가 온통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2∼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루마니아 클루지 헝가리어 극단의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는 바로 이 영화를 무대화한 작품이다. 연극은 베리만의 발언을 명백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해오름극장 위에 설치된 직육면체의 가설무대는 바닥과 사방이 빨간 천으로 뒤덮여 있다.
도대체 왜 빨간색인 거지? 매회 110명으로 제한된 관객은 빨간색 가설무대로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왜 이 영화에서 빨간색이 중요한지 설명을 듣게 된다. 바로 연극에서 베리만 감독 역을 맡은 배우 졸트 보그단을 통해서다. 그는 2011년 내한 공연한 클루지 극단의 ‘리처드3세’에서 리처드 3세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바로 그 배우다.
“계속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사방이 온통 빨간색인 방에 네 명의 여인이 하얀 옷을 입고 있죠. …방 전체가 빨간색이어야 했어요.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파란 용의 영혼을 상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날개가 달려 있고, 절반은 새, 절반은 물고기이고, 내장은 온통 축축한 빨간 막으로 이루어진 용이었어요.”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안드레이 셰르반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 영화의 내용을 이렇게 영화촬영 리허설 현장의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해학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재구성했다. 배우는 딱 여섯. 베리만의 환상 속 네 여인인 카린(에모케 카토) 아그네스(아니코 페토) 마리아(이몰라 케즈디) 세 자매와 하녀 안나(칠라 바르가), 그리고 모든 남자 배역을 소화하는 영화감독 베리만 자신과 그의 여자 조수(칠라 알베르트)다.
베리만은 ‘컷’을 외치며 개입해 배우들과 관객의 장면 이해를 돕는 내면 체험과 설명을 들려준다. 여배우들은 작품 이해가 안 된다며 불평도 하고 “이번엔 절대 안 벗을 거예요”라며 노출연기에 저항도 하고 “오늘 밤 와인 한잔하자”며 감독을 유혹도 한다. 이런 장치는 극 내용에 대해 관객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영화의 몽환성을 넘어서는 생동감을 획득한다.
연극의 내용은 베리만의 또 다른 영화 ‘가을소나타’(1978년)와 비견해 읽어낼 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 네 여성이 등장하는 ‘크라이스…’에는 넘치는 영감의 횃불을 들고 무의식 대륙의 지도를 만들었던 프로이트가 담겼다. 반면 어머니와 두 딸로 이뤄진 세 모녀가 등장하는 ‘가을소나타’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칸트철학을 접목해 입체적 지도를 재구축한 라캉이 담겼다.
라캉적 ‘가을소나타’가 상상계(어머니) 상징계(큰딸) 실재계(막내딸)라는 인간심리의 정립구조를 보여준다면 프로이트적 ‘크라이스…’는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인간심리의 대칭구조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아그네스와 안나(용서와 화해)의 관계는 카린과 마리아(갈등과 증오)의 관계와 대칭을 이룬다. 죽음을 목전에 둔 처녀 아그네스와 외동딸을 잃은 과부 안나는 극심한 상실의 고통을 인간적 연대감으로 극복한다. 반면 유부녀인 카린과 마리아는 각각 피학(자해)과 가학(불륜)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은폐하려는 신경증환자들이기에 죽음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허구성을 감당 못해 뒷걸음친다.
연극 속 여배우들은 딱 세 가지 색의 옷만 입는다. 하양 검정 빨강이다. 배경색인 빨강을 제외하면 하양과 검정만 남는다. 흑백, 그것은 프로이트와 구조주의자들이 발견한 대칭구조를 상징한다. 빨강은 그 대칭구조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영혼의 색깔인 동시에 베리만의 영화세계가 ‘가을소나타’의 삼원구조로 발전해갈 것임을 암시하는 색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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