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고 또 망설입니다. 옷을 들었다 놨다…. 그 사이 점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겁니다.
“손님 어떤 거 보시나요? 아, ‘컬러 팬츠’요?”
그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칩니다.
“아, 아닙니다.”
지난주 서울의 한 백화점 남성 의류 매장에서 목격한 장면입니다. 40대로 보이는 손님이었습니다. 초록색 바지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은 마치 “큰 맘 먹고 한번 입어 봐?”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바지를 놓고 사라지는 뒷모습은 “어휴, 내가 감히…”라고 할까요.
월요일 감색 정장, 화요일 회색 정장, 수요일 검은색 정장…. 연예인이나 프리랜서,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장 남성들은 보통 일주일 내내 무채색 계통 옷을 입습니다. 그렇게 해야 했고 그게 정답처럼 여겼습니다. 1960∼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튀면 죽고 무난해야 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성을 강조하기보다 단체 속에 나를 녹여야 했기 때문이죠.
지금은 다릅니다. ‘옷차림도 전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튀어야 사는 시대가 됐습니다. 남성 의류 브랜드들은 봄을 맞아 초록, 노랑, 빨강 등 형형색색의 바지를 경쟁적으로 내놨습니다. 바지 끝단을 두세 번 접어 입는 ‘롤 업’ 스타일도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입으면 ‘꽃미남’ 된다는 핑크색 셔츠나 체크무늬 재킷 등 상의도 현란해졌습니다. 스카프나 태블릿PC를 넣을 수 있는 파우치 등 남성용 액세서리도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닌 ‘나를 도와주는 패션 아이템’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요즘 남성 패션 유행 중 하나는 재킷 깃을 세워 입는 것입니다. 기자도 깃을 세워 회사에 출근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상사 A 씨는 조용히 깃을 접어줬습니다. 친절한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오늘 급하게 출근했구나. 깃이 엉망이야….”
그날 기자의 깃을 ‘친절하게’ 접어 준 분들은 5명이나 됐습니다.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B 과장은 금요일 ‘캐주얼 데이’를 맞아 과감하게 ‘롤 업’ 스타일을 하고 갔다가 상사들로부터 “바지 잘 못 빨아서 짧아졌냐” “그새 키 컸냐” 등의 핀잔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유명 패션 잡지에선 ‘에메랄드그린’ 바지를 어떻게 입는지, 어떤 모양의 스카프를 어떻게 둘러야 하는지 등 갖가지 옷차림들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백화점에선 형형색색의 ‘신상품’보다 감색 바지나 베이지색 면바지가 인기 있습니다. 내가 튀어도 안 되고 남이 튀는 건 더 못 보는 사람들에게 ‘진짜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출근길, 흰색 바지를 입은 사람을 본다면 “뭘 저런 걸 입었어?”라며 여전히 구시렁거릴 건가요? 아니면 “큰 맘 먹고 나도 해봐?”라고 외칠 건가요? 중요한 건 남이 아니라 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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