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출발한 벨기에 브뤼셀행 기차. 23세의 소프라노는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정부장학금으로 유학 중이던 그는 ‘대타’ 제안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인 터였다. 모차르트 c단조 미사의 솔리스트. 그동안 무대에서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이 작품의 라틴어 가사를 기차를 타고 간 7시간 동안 달달 외웠다.
이제 소프라노 임선혜(37)는 유럽 무대를 누비는 ‘고음악의 여왕’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고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 맑고 투명한 음색과 변화무쌍하고 당찬 연기력으로 인정받는다. 재즈 가수 나윤선이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기립 박수를 이끌어낼 때 임선혜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관객이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동갑내기로 독일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서예리가 현대음악의 뮤즈라면 임선혜는 고음악의 여왕이라 부를 만하다.
베를린에서 6일 오전 11시쯤 전화를 받은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벨기에 출신 고음악 거장 르네 야콥스가 이끄는 헨델 오페라 ‘아그리피나’에서 포페아 역을 맡아 3∼14일 베를린에서 3회, 파리에서 1회 공연 중이다. 야콥스와 녹음한 아그리피나 음반은 지난해 영국의 ‘BBC 뮤직 매거진’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공연 기간에는 목을 아끼기 위해 말을 되도록 하지 않는다는 그는 이번 오페라 도중에 처음 통화를 한다면서 웃었다. “공연이 4시간이 넘는 데다 포페아의 아리아가 10곡이나 돼 컨디션 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 달 유럽을 대표하는 고음악 전문 연주단체 두 곳과 번갈아 내한공연을 펼친다. 6월 1, 2일 바로크 거장 필리프 헤레베헤가 이끄는 프랑스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와, 18일에는 영국 고음악 오케스트라인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AAM·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함께 무대에 선다.
14년 전 벨기에 무대에 그를 대타로 발탁했던 사람이 바로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를 만든 헤레베헤다. 당시 무명의 임선혜에게 “황금 목소리”라고 격찬한 그는 이어진 베를린 무대에 이미 정해진 소프라노의 출연을 취소시키고 임선혜를 세웠다.
“헤레베헤는 오페라는 안 하고 콘서트만 하기 때문에 오랜만에, 그것도 한국 무대에서는 처음 만나네요.”
이번 한국과 일본 투어에서는 모차르트 레퀴엠을 선택했다. 그는 “헤레베헤는 연습할 때는 단원과 성악가들이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막상 본공연 때는 홀린 듯 연주하게 만드는 지휘자”라고 했다.
AAM과는 ‘사계(四季) 프로젝트’를 꾸민다. AAM이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임선혜가 등장해 퍼셀과 헨델이 남긴 계절과 관련된 가곡과 아리아를 부른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퍼셀 ‘요정 여왕’ 모음곡 중 ‘보라, 밤의 여신마저 여기 왔도다’를, 겨울의 문턱에서는 헨델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 중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 ‘폭풍 속에서’를 노래한다.
“고음악은 소소한 음악이에요. 전율을 일으키는 극한의 고음이나 웅장함은 없어요. 하지만 음악가들이 눈빛을 교환하면서 촘촘한 하모니를 이루는 즐거움이 극대화되죠. 기름기 쏙 빠진 담백한 맛이 일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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