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번역 출간된 저서 ‘약한 건축’에서 ‘지는(defeated) 건축’이라는 개념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 도쿄대 교수(59). 최근 내놓은 신간에선 ‘연결하는 건축’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지는 건축’이란 건축가의 주관을 내세우기보다 건축주나 사회의 요구, 건물이 들어서는 지역의 환경을 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럼 연결하는 건축이란 무엇일까. 강원 춘천시에 들어설 NHN 연수원 설계와 홍익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강연을 위해 7일 방한한 구마 교수에게 물었다.
“지는 건축이란 건축이 모뉴먼트(기념비)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로 지는 건축이라는 수동적인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건축가는 적극적으로 공동체 형성을 유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었다. 대지진 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이토 도요오, 세지마 가즈요를 비롯한 건축가들과 ‘귀심회(歸心會)’를 만들어 피해 지역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집회소인 ‘모두의 집’을 짓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축물이다. 지난달 2일 도쿄 긴자에 들어선 5번째 가부키 공연장인 가부키자(歌舞伎座)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잇는 건축물이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줄 몰라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가부키자에 충실한 건축을 하고 싶었죠.”
3·11 대지진은 일본 사회에서 전환점이 됐다.
“전후 일본인들은 인공이 자연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자연이란 어마어마하게 강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죠. 지진해일(쓰나미)에서 살아남은 건축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에요. 콘크리트 빌딩은 사라졌지만 자연에 대항하지 않고 어울리는 건축물은 견디어냈지요.”
그는 정권 교체와 대지진의 경험이 ‘부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전 정권을 부수고 정권 교체를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금은 부수는 것보다 다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울을 수십 차례 방문했다는 구마 교수는 한국의 공공 건축물이 비판받는 이유도 연결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시 신청사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모두 형태는 독특하지만 주위와 연결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모뉴먼트이면 좋을 텐데 대개는 건축가나 정치인들을 위한 모뉴먼트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서울은 새로운 것에 왕성하게 탐닉합니다. 그건 장점입니다. 하지만 새것에 대한 욕망이 욕망에만 그칠 뿐 기존의 것과 어떻게 연결지을지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본질은 강과 산과 언덕인데 지금 서울의 모습은 본질을 지워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본질을 살려내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내는 스타 건축가에게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건축가와 젊은 건축학도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1990년 버블 경제가 끝나고 10년간 일감이 없었어요. 당시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썼던 것이 지금 제 건축의 기반을 만들었지요. 젊은 시절 미국 뉴욕에 가니 일본 전통 건축이 보이고, 건물 하나 없이 뱀과 모래만 있는 사하라 사막에 머물면서 오히려 건축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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