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 한 번, 전미도서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두 번씩 받았고, 펜 포그너상을 세 번 받은 작가.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저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독서욕이 샘솟지만 일독하기는 쉽지 않다. 1940, 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밥 펠러가 거짓말처럼 두 게임이나 패하고, 재키 로빈슨만큼 존경하진 않지만 아메리칸리그를 개척한 흑인 선수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던 래리 도비가 22타수 7안타를 친 월드시리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본문의 일부처럼 소설은 ‘기호학’에 가까운 대목이 적지 않다. 이른바 문화와 역사의 차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지는 말자. 진득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인물들의 개성이 살아나고, 그들의 치열한 인생이 지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렇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색과 열정이 가득한 책은 누구에게나 울림을 준다. 명작이란 그런 것이다.
500쪽을 훌쩍 넘는 책의 초반은 미로와 같고 장광설도 길다. 1997년 뉴잉글랜드 서부의 작은 마을에 살던 네이선 주커먼은 고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머리 린골드를 만난다. 머리는 주커먼이 어릴 적 자신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아이라 린골드의 형. 아흔 나이의 선생님은 이제 40대가 된 제자에게 동생에 대한 숨겨졌던 얘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대화와 50여 년 전 아이라의 모습이 교차하며 소설은 진행된다. 그렇기에 아이라에게 초점을 맞추면 소설은 한결 선명하게 읽힌다.
아이라는 범부에 가까웠다. 2m가 넘는 거구의 사내는 고교를 중퇴한 뒤 광산 인부, 레코드공장 노동자를 전전하지만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변한다. 1940년대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유색인종 차별과 자본주의 횡포에 그는 분연히 반대한다. 노조 행사에서 링컨 역을 맡은 그의 진심 어린 열정적 연기는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라디오 드라마의 주역으로 발탁돼 유명해진다.
소설은 아이라를 영웅으로 띄우지는 않는다. 무성영화 스타 이브 프레임과의 결혼 뒤 비참했던 가정생활을 철저히 파헤치며 그의 고독과 번민을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아이라와 이브, 그리고 이브와 전남편 사이의 딸인 실피드의 엇갈린 애증 관계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며 한 가정의 파멸을 조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매카시즘(1950년대 초 미국을 휩쓸었던 반(反)공산주의 열풍)을 다룬 정치풍자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한 가정사를 깊이 있게 성찰한 가족소설이기도 하다.
아이라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파멸의 길을 걷고, 이를 폭로했던 이브도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다. 정체도 불분명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은 처연하다. 그 뒤에는 매카시즘으로 재미를 본 정치인들이 있다. 작품 중간에 6·25전쟁과 한국 파병을 결정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아이라의 열변은 흥미롭다.
‘뇌가 반이라도 있는 미국인이라면 북한 공산군이 배를 타고 6천 마일을 건너와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믿겠니.…트루먼은 공화당원들한테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는 거야.…무고한 한국 민중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어. 한국에 쳐들어가 그 개자식들을 폭탄으로 쓸어버리겠다 이거지. 알겠니? 이게 다 이승만이라는 파시스트를 지원하기 위해서야.’
아이라는 철저한 이론가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평등과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 머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브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한 게 아닐세.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갈망한 남자와 결혼한 거야.”
책장을 덮으면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선연히 빛나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 속에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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