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신국립극장 연극·뮤지컬 전용 극장의 무대는 천장 높이가 12m나 된다. 이 무대 한복판에 한국에서 공수된 흰색 무명천이 꼬여 있었다. 이불 안감이나 기저귀로 쓰이는 소창은 한국 전통 굿에서 무당이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할 때 쓰는 ‘길베’로도 활용된다. 그 대형 소창을 꼬아 만든 이 무대장치는 한국의 옛 마을 입구에 서 있던 당산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10일 오후 6시 반 일본에서 먼저 개막한 한일 합작극 ‘아시안 온천’에서 이 대형 소창은 연극 속 가상의 섬 어제도의 신수(神樹)가 된다. 한국 예술의전당과 국립극단, 일본 신국립극장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이 대본을 쓰고 국립극단 예술감독 손진책이 연출을 맡았다. 한국 배우 11명과 일본 배우 11명이 출연해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공연한다. 2008년 예술의전당과 신국립극장이 공동 제작한 정의신 원작 ‘야끼니꾸 드래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내용과 형식은 전혀 다르다. 아시아의 외딴 섬 어제도를 배경으로 전통을 지키려는 원주민과 온천을 개발하려는 외지인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다뤘다. 한국 배우들은 버려진 어제도의 황무지를 3대에 걸쳐 사탕수수밭으로 일군 대지(김진태) 일가를 중심으로 한 원주민 역할을 맡았다. 일본 배우들은 온천 리조트를 개발하러 찾아온 가게루(가쓰무라 마사노부)와 아유무(재일교포 배우 조성하) 형제로 대표되는 외지인을 연기한다.
원주민과 외지인의 구도에는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가 투영됐다고 볼 수도 있다. 배경이 섬이라는 점 때문에 독도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연극은 이런 민감한 현실을 비켜가는 알레고리(우화)의 형식으로 자연친화적 뮈토스(신화)와 문명이기적 로고스(이성)의 맹점을 동시에 비판한다. 대지 영감은 불합리한 금기로 가득한 섬의 전통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분명 자연친화적이긴 해도 원주민이 겪는 빈곤과 억압의 사슬이 되기도 한다. 반면 어제도 출신이지만 할아버지 때 도회지로 이주한 가게루 형제는 경제적 효율성과 법리적 합리성으로 무장했다. 형 가게루가 복잡한 모든 문제를 중립적 손익의 관점으로 환원시키는 돈의 힘을 신봉한다면, 동생 아유무는 합리적 설득의 수단으로서 법의 힘을 믿는다.
양측의 대립 구도는 결국 비극적 희생양을 낳는다. ‘금지된 사랑’을 나누던 아유무와 대지 영감의 딸 종달이(이봉련)다. 아유무는 대지에게 우발적으로 살해되고 이를 발견한 종달이는 제 몸에 칼을 꽂는다.
뮈토스는 늘 이런 진실을 축제의 형식으로 은폐하고 억압한다. 원주민은 둘의 죽음을 아름다운 정사(情死)로 포장해 영혼결혼식을 열려 한다. 하지만 로고스는 집요하게 진실을 요구한다. 동생의 석연찮은 죽음을 추적하는 가게루 앞에 대지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그 순간 윤리적 전회(轉回)가 발생한다. 가게루는 돈의 힘으로 리조트 사업을 밀어붙인 자신 역시 그 비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동생과 종달이의 영혼결혼식에 동참한다. 그 순간 한국적 진혼의 축제로서 굿의 위력이 한껏 발휘된다.
무대 천장에 매여 있던 소창이 풀리면서 무대는 물론 객석까지 뒤덮는다. 막간극 형식으로 일본식 만담을 펼치는 우시조 우마조 도조의 3인조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던 온천을 대신하는 듯한 효과도 낳는다. 그 순간 무대 뒤에서 흰옷 차림의 아유무와 종달이가 슬로 모션으로 달려 나온다.
자이니치(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리얼리즘 연극에 강한 정의신과 한국의 전통 마당극을 현대화해 온 손진책의 만남에선 손진책 스타일이 좀 더 빛을 발했다. 가무가 결합한 마당극의 국악을 현대적 음악으로 바꾸고 마당을 조명으로 빚어 낸 원형 무대로 변형시킨 ‘열린 연극’으로 “얌전한 일본 관객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사카테 요지).
손진책 씨는 “1년 전 처음 작품 의뢰를 받고 일본에 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다운돼 있어서 신명을 돋워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한일 관계가 경색된 국면에서 연극을 통해 양국 배우가 하나 되는 문화적 체험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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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까지 일본 공연을 마치고 6월 11∼1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2만∼4만 원.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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