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구성이 헐거우면 어김없이 마감에 쫓겨요. 1980년대 최고의 작업실은 8번 순환 시내버스였어요. 작업실이 있는 서울 수유리(강북구 수유동) 앞에서 버스를 타고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1시간 반 동안 ‘임꺽정’ ‘머털도사’의 엉킨 실타래를 풀고, 다시 엮어서 작업실로 돌아오면 제 시간에 마감을 끝낼 수 있었어요.”(만화가 이두호)
“콘티를 완성했더니 오전 6시였죠. 마감까지 딱 6시간 남았는데 스케치대로 그리려면 최소 9시간이 필요했어요. 스토리에 공을 많이 들인 에피소드지만 마감을 넘기면 ‘작가 초심 잃었네’ ‘독자 농락하느냐’ 같은 악플이 달릴까 봐 외곽 라인은 과감하게 생략해서 겨우 마감 시간에 맞췄습니다.”(웹툰 작가 이동건)
마감 직전의 만화가들은 모래판에서 샅바를 잡는 순간의 씨름 선수처럼 초조해진다. 만화 스토리와 씨름해 온 그들은 지칠 새도 없이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마감에 대처하는 법은 만화가의 개성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여자 동성애자들을 다룬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를 연재 중인 완자 작가는 대표적인 ‘자학형’이다. 원고를 털고 나면 언제나 손톱이 뭉툭하게 짧아져 있는데 이는 마감하는 짬짬이 손톱을 갈아내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웹툰 작가는 마감 하루 전부터 한 끼도 먹지 않는다. “탄수화물을 먹으면 잠을 참을 수가 없어 차가운 음료만 마신다”고 설명한다. ‘목욕의 신’의 하일권 작가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휴대전화도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둔다.
반면 ‘닥터 프로스트’의 이종범 작가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놓는다. “대화 상대 없이 일하면서 적적함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리턴’의 송래현 작가도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마감을 한다. ‘신과 함께’의 주호민 작가는 마감 전 ‘책상 정리’가 주특기다. “마감만 가까워지면 모든 것들이 재밌게 느껴진다”고 한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일부러 여유를 부리는 작가도 있다. ‘황토빛 이야기’ ‘빨간 자전거’를 그린 김동화 작가는 마감이 다가와 초조해지면 마당에 나가 나무와 화초를 손질하며 마음을 달랜다. “겉으론 침착해 보여도 실은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맨손으로 앵두나무, 소나무, 능소화의 마른 줄기와 이파리를 모두 뜯어내요. 그러고 나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죠.”
‘라스트’의 강형규 작가는 “마감일이 가장 한가한 날”이라고 했다. 편집과 작화가 끝나면 곧 스토리 작업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진다고. 그는 마감일엔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마무리 작업을 한다. 다만 스토리 구상 땐 절주가 원칙이다. “마감할 땐 24시간 책상에서, 스토리 구상은 침대에서 뒹굴며 한다”는 ‘옥수역 귀신’의 호랑 작가와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강형규 작가는 “정기적으로 마감을 해야 하는 작가들에겐 일주일을 매달려도 하루가 모자라고, 사나흘을 바짝 일해도 하루가 모자라는 ‘마이너스 하루의 법칙’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동화 작가는 “수십 년 동안 마감에 쫓기며 살았지만 그래도 창작하는 사람들이 마감이 없으면 반도 일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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