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일본 우경화의 심연 ‘天皇制’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8일 03시 00분


일본 사회에 우경화의 격랑이 몰아치고 있다.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료와 의원들이 줄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왕을 처벌하지 못했고, 군국주의 세력 청산에 실패한 것이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28년 11월 10일 대관식 때 히로히토 일왕.
일본 사회에 우경화의 격랑이 몰아치고 있다.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료와 의원들이 줄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왕을 처벌하지 못했고, 군국주의 세력 청산에 실패한 것이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28년 11월 10일 대관식 때 히로히토 일왕.
무쓰히토(睦仁·연호는 메이지·明治) 일왕의 장례일인 1912년 9월 13일 오후 7시 40분. 러일전쟁을 이끌었던 일본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부인과 함께 벽에 걸린 일왕의 사진 밑에 정좌했다. 그가 일본군도로 자신의 배를 십자로 긋고 할복하자 부인 시즈코(靜子)는 호신용 칼을 심장에 대고 앞으로 엎어져 자결했다. 1877년 벌어졌던 내란 ‘세이난(西南) 전쟁’에서 일왕이 준 연대 깃발을 빼앗긴 죄를 용서해준 것에 대해 죽음으로 보답한 것이었다. 노기 장군의 할복 자결은 일본 메이지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면서 이후 제국 군대에 큰 영향을 줬다. 전국 각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신사가 세워졌고 근대화 시기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는 ‘마음’이라는 작품에서 그를 기렸다.

노기 장군의 일화는 일왕이 근대 일본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다. 이런 일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은 군국주의 이념의 토대가 됐고, 침략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왕은 실제 권력을 내려놓고 ‘상징’으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숭배자들의 충성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 11월 25일. 대장성 관료를 지낸 엘리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일왕 숭배모임 회원들과 함께 도쿄(東京)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난입했다. 총감실을 점령하고 발코니에 나가 일왕에 대한 충성과 자위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그는 “천황(天皇) 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할복 자살했다. 일본군 장교가 일왕을 다시 옹위하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하다 미수에 그치자 할복한다는 내용의 자신의 소설 ‘할복’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11월 25일은 1926년 히로히토(裕仁·연호는 쇼와·昭和) 일왕의 쇼와 시대가 시작된 날이었다.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거나 일왕을 비판한 인사는 우익의 테러를 면치 못했다. 군국주의 일본을 이끌었던 히로히토 일왕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88년 12월 7일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나가사키(長崎) 시의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이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일왕 표기: 동아일보는 일본의 왕을 일왕(日王)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직접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天皇)이라고 돼 있는 경우, ‘천황제(天皇制)’를 설명할 때만 천황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일본 우경화의 심연 '天皇制'
▼ 年1회만 직접 회견… 말걸기 금지, 10m내 촬영 금지 ▼

“나의 군대생활 경험에서 볼 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우익의 총격 테러로 중상을 입었다. 1960년 꿈에서 일왕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소설을 연재한 시사월간지 주오고론(中央公論) 사장도 이듬해 피의 보복을 당했다. 집에 침입한 우익 테러범이 가정부를 살해하고 부인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히로히토 일왕이 1989년 1월 7일 세상을 떠나자 일본 전체가 숨도 쉬기 어려운 자숙(自肅) 분위기에 빠졌던 것은 당연했다. 상가는 철시했고 모든 행사는 취소됐다. 당시 문을 연 가게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화염병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한류(韓流) 열풍이 차갑게 식고, 서울 명동과 남대문시장을 누비던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든 근본 원인으로 지난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사죄 요구 발언을 한 점을 꼽는 전문가가 많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과거사를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왜곡하고 나선 것도 일왕의 존재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이 과거사를 인정하고 책임을 명확히 하면 일왕의 전쟁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아키히토(明仁·연호는 헤이세이·平成) 일왕은 조선 합병에 관여한 무쓰히토 일왕, 3·1운동 뒤 문화통치를 펼친 요시히토(嘉仁·연호는 다이쇼·大正) 일왕, 군국주의와 침략 전쟁의 선두에 선 히로히토 일왕 등 선대 일왕들과는 다르다. 일본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의 발언에 일본 국민이 더 반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기억의 단절이다. 대다수 일본 국민은 현재의 일왕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화, 희생과 헌신을 떠올리지만 선대 일왕의 전쟁 책임은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1948년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돼 처벌을 받았다면….

전후 연합군 점령 종료 후에도 자기 손으로 나치 전범을 계속 추적해 10만 건 이상의 전범 용의자를 수사하고 6000건 이상의 유죄 판결을 내린 독일식 과거사 청산이 일본에서라고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도 어쩌면 용서와 화해의 출발점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일왕은 일본인 정체성의 상징

도쿄 지요다(千代田) 구 지요다 1-1. 일왕의 거처인 고쿄(皇居)의 주소로 도쿄 도심 정중앙이다. 일반인은 사전에 신청을 하면 고쿄를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일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일인 12월 23일과 새해 둘째 날인 1월 2일뿐이다.

영상 10도를 웃돌 정도로 포근했던 올해 1월 2일 오전 고쿄를 찾았다. 입구에는 끝없이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등 5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서도 버스들이 왔다. 한 우익단체 회원들은 무료로 일장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일왕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검문. 금속탐지기를 통과한 뒤 여경이 거의 몸을 더듬는 수준으로 구석구석을 체크했다. 그 뒤에는 정해진 구역에서 줄을 서야 했다. 대략 10열 종대. 줄에는 노인만 있는 게 아니다. 20대 연인들이 손을 잡고 서 있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목말 태운 가족도 보였다. 이들은 경찰의 지휘를 받으며 고쿄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두 개 건너야 고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에게 떠밀려 자연히 앞으로 이동한다.

갑자기 ‘와∼’ 하는 탄성이 울려 퍼졌다. 아키히토 일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궁전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일제히 일장기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일왕과의 눈 맞춤을 통해 그들은 “우리는 일본인”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일왕의 위상은 ‘살아있는 신(神)’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일왕은 여전히 일본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초중고교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국가다.

일명 기미가요(君が代).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황의 치세는 천대에서 팔천대까지(이어지리라)/조약돌이 반석이 되어/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일본의 모든 일간지는 매일 한 건 이상씩 일왕 부부의 동정을 싣고 있다. 일왕에 관한 기사는 보통 기사와 달리 ‘…하시었다(された)’는 식의 경어를 쓰고 있다. 일부 진보지가 평어체로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일왕에 대한 기사 비중이 커져 독자의 주목도가 높아질 때는 역시 경어를 쓴다. “무례하다”는 독자들의 항의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왕실업무를 전담하는 궁내청 등록기자는 300∼400명. 총리실 등록기자 수(380명)에 맞먹는 규모다. 궁내청 장관과 차장, 왕세자를 담당하는 동궁 대부가 정기적으로 기자회견을 하지만 일왕을 직접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족에게 말을 거는 것도 금지돼 있다. 일왕은 연 1회 생일 때만 직접 기자회견을 한다. 이때도 1개월 전 미리 질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사진 취재도 대개 10m 이상 떨어진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모두 망원렌즈를 사용하고 있다.

사회지도층으로 올라갈수록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가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총리, 중·참의원 의장, 최고재판소 장관 등 국가 삼권 수장이 일왕에게서 임명장을 받는다. 해외로 나가는 대사와 공사도 일왕의 신임장을 주재국에 전달한다. 헌법에 정해진 일왕의 국사(國事) 행위다. 일왕의 지방 방문 때는 현(縣) 지사와 현 의회 의장이 일왕 부부를 수행한다. 국민체육대회나 각종 문화행사에서도 일왕은 자리를 지킨다.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일왕의 훈장을 받는 걸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일반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천황이라는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모두 천황과 연을 맺게 되고 항상 의식하게 된다.” 왕실담당 기자의 말이다.

연간 25차례 치르는 궁중제사도 국사는 아니지만 일왕의 핵심 업무다. 조상신을 비롯해 천지신명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로 집행 장면은 일절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 궁중제사는 ‘천황제’의 역사적 영속성을 담보하는 핵심 장치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일왕의 존재는 일반 국민의 삶 곳곳에도 스며들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일본인 교수는 본보 인터뷰에서 “신사참배 등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인의 생활에 눈에 안 보이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느낀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가 바로 천황이다”라고 설명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일왕의 존재감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당시 간 나오토(菅直人) 정권이 원전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허둥대 국민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이때 아키히토 일왕이 결연한 목소리로 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는 장문의 비디오 녹화 메시지를 발표했다. 국민들은 이 메시지를 통해 ‘이 나라에는 천황이 있다. 용기를 갖자’는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천황제가 없는 일본은 어떻게 되나”라고 묻자 한참을 고민하던 교수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우경화의 포로가 된 아키히토 일왕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헌정기념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국의 점령이 끝난 이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주권 회복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올해로 61년째이지만 정부 주최 기념식이 열린 것은 처음. ‘상징 천황’인 일왕은 내각이 참석을 요구하면 이를 거절할 권한이 없다.

이날 행사는 ‘주권 회복’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초안을 잡은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출정식 자리였다. 행사가 끝나고 일왕 부부가 단상을 빠져나가려 할 때 단상 아래에서 누군가가 “천황폐하 만세”를 선창했다. 이를 따라 아베 총리 등 주요 참석자들도 만세 삼창을 했다. 군국주의 문화의 상징이었던 ‘천황폐하 만세’가 정부 행사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아베 정권이 일왕 부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일왕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우경화 세력이 일왕을 등에 업고 폭주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찾은 히로히토 일왕(오른쪽)이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을 뒤로 한 채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과 두 손을 반듯하게 내린 채 긴장한 표정의 히로히토 일왕이 대비된다. 동아일보DB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찾은 히로히토 일왕(오른쪽)이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을 뒤로 한 채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과 두 손을 반듯하게 내린 채 긴장한 표정의 히로히토 일왕이 대비된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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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을 국가의 중심으로 규정한 제국헌법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와 장기 경기침체는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는 토양이 됐다. 일본 사회 전반에 위기감이 커지자 전후 “미국이 심어놓은 사회시스템과 교육체계가 잘못됐다”며 일본인 중심의 ‘국민의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직적으로 확산됐다. 자칭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그룹이 역사 왜곡 교과서 제작에 나섰고 일본의 근대사를 반성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자학(自虐)사관’이라고 공격했다.

일본 의회는 1999년 히노마루(日の丸)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2005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을 기리는 ‘쇼와의 날’을 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베 1차 정권 때인 2006년에는 연합군 점령기 때 만들어진 교육기본법을 59년 만에 개정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했다. 지난해 말 출범한 아베 2차 정권은 마침내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한 자민당 헌법 초안을 바탕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의 이런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정해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1952년 4월 28일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1조는 ‘일본국은 극동군사재판소 및 일본국 내외의 전범에 대한 판결(judgement)을 수락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어떤 조건도 없이 도쿄 전범재판의 판결내용을 수용한 셈이다. 이는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를 승인함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일왕의 전쟁 책임 추궁이 고도의 정치판단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가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 게이오대 법대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후 고도성장기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소득을 배증하겠다며 국민을 통합했다. 지금 아베 총리가 일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국민을 통합하고 불만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비용이 가장 적게 들어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주도한 ‘실질적 통치자’ 히로히토 일왕

히로히토 일왕은 1901년에 태어나 1926년에 일왕이 됐다. 19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63년간 일본에 군림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평생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외면했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800자의 ‘대동아전쟁 종결조서 선언문’에서부터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범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1975년 10월 31일 궁내청 기자회견. 히로히토 일왕이 미국 방문 때 백악관 만찬 석상에서 “내가 깊이 슬퍼하는 그 불행한 전쟁”이라고 한 말을 인용해 한 기자가 “이는 천황이 전쟁 책임을 느끼고 있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일왕은 “그런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서는, 나는 그런 문학 방면은 그다지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도 이를 뒷받침했다. 1945년 8월 28일 미군 제1진이 상륙하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당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일억 총 참회론’을 펼쳤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정부의 정책이 옳지 못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국민이 도의에 어긋난 것도 원인이다. 이참에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 전쟁은 모두가 나빴기 때문으로 일왕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심지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은 다음과 같은 정부 담화를 내놓았다.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세계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일편단심으로 기원하시고 날마다 몸소 실천해 왔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에서 전쟁의 참화로 괴로워하는 국민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결심하셔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리셨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은 ‘일본제국헌법’을 채용하고 있었다. 제국헌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일왕은 실제 일본제국의 통치권자였다. 문무관의 임명, 육해군의 통수권, 선전·강화 및 조약체결 등 군사 외교와 관련된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히로히토 일왕은 통수권을 적극 행사했다.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옹호하는 칙어를 내렸고 1941년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조서에 서명했다. 일본군은 ‘천황폐하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아시아를 유린했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였던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히로히토 일왕의 일생을 추적해 2000년에 내놓은 저서 ‘히로히토 평전: 현대 일본사회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은 반성 없는 생애를 살았다”고 비판했다. 이 책은 이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빅스 교수는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에서 화학무기와 최루탄 사용을 375차례 허가했고, 식민지 국민과 전쟁포로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 창설을 재가했다”고 고발했다. 또 그는 “히로히토 일왕은 명목상의 인물이나 소극적인 방관자, 황실 고무도장이나 서류에 찍는 무기력한 인물이 아니었다”며 “책임의 한계는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폭넓은 군사지식을 갖춘 간섭주의 성향의 역동적 군주였다”고 강조했다.

일왕의 책임을 국무대신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헌법 3조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고 못 박은 데 이어 55조에 ‘국무대신이 일왕의 의사결정을 보필한다’는 도피 규정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왕의 통수권은 국무대신의 보필에서 독립돼 있었다. 그 근거는 1882년 메이지 일왕이 내린 군인칙유(軍人勅諭)였다. 칙유는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기치(美濃部達吉)는 ‘헌법찰요’(1927년)에서 통수권의 독립 운용에 대해 ‘군국주의의 폐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천황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헌법상의 한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라는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주장하다 1935년 귀족원에서 물러나고 다음 해 격분한 우익의 총탄에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에게 있음은 우리 국체(國體·천황과 그의 신표인 곡옥, 거울, 검 등 3종의 신기)의 본의이며 제국 신민(臣民)의 절대 부동의 신념이다”는 내용의 ‘국체 명징(明徵)에 관한 정부 성명’을 냈다.

일본 지도부도 얼떨결에 일왕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육군대장은 도쿄 전범재판 때 군부의 의사결정과 관련해 무심코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자신과 군부가 일왕의 뜻에 따라 침략전쟁에 나섰다고 인정한 대목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현 부총리는 외상이던 2006년 1월 일왕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하면서 “영령은 천황폐하 만세라고 했지, 총리 만세라고 한 것은 아니다. 천황 폐하가 참배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했다. 영령들이 일왕의 뜻을 받들어 전쟁터로 갔다는 의미다.

히로히토에 대한 면책, 일본 우경화의 기반 제공

제2차 세계대전 3대 전범국가 지도자 중 히틀러 독일 총통은 자살했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는 반(反)파시스트 유격대원에게 살해됐다. 유일하게 히로히토 일왕만 처벌을 면했다. 그 이면에는 미일(美日) 간의 거래가 숨어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은 점령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을 맞바꿨다.

1945년 9월 27일 아침. 히로히토 일왕은 중산모를 쓰고 정장 예복 차림으로 붉은색 롤스로이스에 몸을 싣고 궁을 나섰다. 그의 이름은 연합군 전범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었다.

차가 멈춘 곳은 미국 대사관저 앞. 히로히토 일왕이 차에서 내리자 맥아더 사령관이 악수를 청하며 그를 맞았다. 두 사람은 대사관의 큰 거실에서 나란히 선 채 석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일왕을 이처럼 가까이서 찍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에서 히로히토 일왕은 안경을 낀 채 모닝코트와 줄무늬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채 차렷 자세를 취했다. 키 큰 맥아더는 제복 셔츠의 윗 단추를 푼 채 두 손을 엉덩이에 얹은 느긋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며칠 뒤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패전의 고통을 실감하면서 일왕이 곧 퇴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신(神)이라는 일왕의 가면을 벗기려는 포석과 함께 나약한 일본 왕의 모습을 연출해 전쟁 책임을 면제해 주려는 맥아더의 치밀한 ‘점령작전’이 깔려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두 사람은 회담 장소로 향했다. 일본 측 통역관 1명만 배석한 채 회담은 40분간 이어졌다. 회담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통역관의 수기가 1975년 언론에 공개됐다.

히로히토: “앞으로는 평화의 기초 위에 신일본을 건설하기 위해 나 역시도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하겠습니다.”

맥아더: “그건 숭고한 마음입니다. 나도 같은 마음입니다.”

히로히토: “포츠담 선언을 정확히 이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시종장을 통해 각하에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맥아더가 당초 면담을 거부하자 시종장을 통해 점령정책에 충실하게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전달했다. 이날 만남에서 일왕은 천황제 존속을 위한 ‘빅딜’에 성공했다. 패전 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일왕은 이날 회담 이후 잠을 잘 잤다고 한다.

2011년 4월 27일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미야기 현 미나미산리쿠의 대피소를 찾아 이재민을 위로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2011년 4월 27일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미야기 현 미나미산리쿠의 대피소를 찾아 이재민을 위로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 히로히토 戰犯 명단서 빠지며 국군지도부도 대거 생존 ▼

1945년 6월 초 갤럽의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7%는 일왕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의 회담 직전인 1945년 9월 18일에는 일왕을 기소해야 한다는 합동결의안 94호가 미 상원에 제출됐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일왕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맥아더가 도쿄에 도착하기 전 700만 명의 육해군을 무장해제했다. 맥아더는 일왕에 대한 국민의 충성심을 역이용하면 점령정책이 수월해지고 일본을 개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맥아더는 일왕의 신성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45년 12월 15일 천황제 신앙의 기틀인 국가 신도(神道)를 해체한 데 이어 보름 뒤인 1946년 1월 1일에는 일왕이 신이 아니라는 ‘인간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5일 연합군 총사령부 명의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일왕 불기소 방침을 굳혔다. ‘일왕에 대한 전범재판을 하면 점령계획을 변경해야 하며 일본인들이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로 인해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100만 명의 군대와 수십만 명의 행정관과 전시보급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11개국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국제검사국(IPS) 집행위원회는 같은 해 4월 5일 28명의 피고 명단(A급 전범)을 작성했지만 히로히토 일왕의 이름은 제외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2일 도쿄 전범재판 선고에 따라 도조 히데키 전 육군대장 등 7명의 교수형이 한 달 뒤인 12월 23일 집행됐다. 이날은 아키히토 현 일왕의 생일이기도 했다.

수십 년간 히로히토를 연구한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간세이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저서 ‘히로히토와 맥아더’에서 “도쿄 재판은 주역을 빼놓은 채 도조 일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미일의 합작품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후 일본에서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사실상 터부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왕이 ‘상징 천황’으로 살아남고 냉전 기류에 편승해 군국주의 지도부도 대거 살아나 복권됐다. 이들과 후손이 그대로 일본 정계를 주도하면서 군국주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도 만주국(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에 세운 괴뢰국가) 고관을 지내고 전범으로 기소됐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나치 범죄에 대해 독일은 세대를 이어 영원히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전후 일왕의 전쟁 책임을 묻지 못한 채 우경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역주행과 뚜렷이 대비되는 대목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통석의 염’

처음부터 상징 천황으로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과는 크게 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1975년 왕세자 신분으로 미군이 반환한 오키나와(沖繩)를 방문했을 당시 그는 화염병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한 모습으로 오키나와 방문을 끝까지 마쳤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던 일본의 좌파세력까지 그에게 매료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1989년 왕위를 계승한 그는 1992년 중국을 방문해 과거사에 유감을 표시했다. 2005년 6월에는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오키나와인과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에 참배했다. 사이판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과 연합군의 격전 끝에 7만500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숨진 곳이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에서 그는 “우리나라로 말미암은 불행한 시기에 귀국 여러분이 고통을 맛본 걸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또 아키히토 일왕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저널리스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방문은 일왕의 희망 사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역사교과서 문제로 양국 간 갈등이 증폭되던 2001년 12월에 그는 “간무(桓武·737∼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발언했다. 간무 일왕의 명을 받들어 만든 속일본기에는 간무 일왕의 생모인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전하며 백제의 건국신화도 싣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2003년 12월 “내 생애 가장 슬펐던 일은 300만 명 이상의 일본인과 수많은 외국인 희생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 더욱 힘들었다”고 말했다. 2004년에는 기미가요 제창과 히노마루 게양을 강제화한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강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은 1933년 생으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어린 나이에 패전을 경험했다. 1946년부터 4년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서 영어와 함께 민주주의 이념을 배웠다. 그 영향인지 아키히토는 당시 기독교계 대학을 나온 평민 미치코(美智子)와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다 결혼했다.

이후 그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경호가 삼엄했던 선왕과 달리 외출 때 교통신호 통제를 폐지하고 수행원도 최소화했다. 재해현장에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일왕 부부는 사소한 것도 상대를 배려한다. 차안에서 인사할 때도 아키히토 일왕이 항상 더 고개를 많이 숙인다. 한 컷에 일왕 부부를 모두 찍으려는 사진기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고개를 똑같은 각도로 숙이면 함께 앉은 왕비의 얼굴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 기자는 “아키히토 일왕은 좌우 모두에게서 사랑받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까지 수습하면서 황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되찾은 셈이다”라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과거사 문제 등에서 오히려 우익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동정론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변화하는 왕실, 왕실 스캔들은 잡지 단골소재

일본 천황제는 기원전 660년 진무(神武) 일왕 때부터 시작됐다고 고사기(古事記·712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에 적혀 있다. 진무 일왕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천상계를 지배하는 여신의 후손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진무 일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에도(江戶) 말엽 존왕양이(尊王攘夷)파가 “진무 창업 정신으로 돌아가자”며 왕정복고를 주장하면서 진무 일왕의 건국 신화를 부각시켰다.

천황으로 호칭된 최초의 인물은 덴무(天武·재위 673∼686년) 일왕이다. 그는 율령(律令)체제를 완성하고 왕족 중심의 전국 통치기구를 정비한 인물이다. 스스로를 신격화했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섬기는 이세(伊勢)신궁을 국민이 받들게 했다. 그가 일왕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가 고사기와 일본서기다.

일왕은 12세기 말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서면서 권력을 상실한 뒤에도 막부가 끝난 19세기 말까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권자는 막부를 통솔하는 쇼군이었다.

1867년 메이지 정부를 세운 주도 세력은 지방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본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식 국가체제와 국민 통합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였다. 일본은 신국(神國)이고 일왕은 신이며 일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불교의 영향 안에 있던 토속신앙인 신도를 분리하고 이를 통해 일왕의 신격화를 본격화했고, 헌법에 일왕 가문의 통치를 명문화했다. 일본 민족 전체가 순수하고 유일한 가문인 일왕가에서 유래하며 일왕이 일본 민족 전체의 가장이라는 뜻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1882년 군인칙유와 1890년 교육칙어를 통해 강화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경험을 통해 확실히 정착됐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패전 후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 선언’과 함께 해체됐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일왕은 56대 고레히토(惟仁) 일왕 이후 125대인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까지 여덟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히토(仁)를 이름에 쓰고 있다. 이는 같은 집안의 남자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한국에서 형제간에 ‘돌림자’, 즉 항렬(行列)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 풍습이 전래된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일본 왕실도 급변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에 이어 장남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도 외교관 출신의 평민인 마사코(雅子)와 결혼했다. 왕세자의 조카이지만 왕실의 유일한 손자로 나루히토 이후 일왕 승계 1순위로 꼽히는 히사히토(悠仁)는 올해 ‘평민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왕족 자녀가 평민 초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다.

시사잡지와 여성지는 왕실 기사를 연예인이나 정치인 스캔들 다루듯 매주 보도하고 있다. 추측 보도도 난무하고 있다. 특히 나루히토 왕세자의 아내인 마사코 왕세자빈은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적응장애를 이유로 10년째 요양하자 “공무를 게을리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학자인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81) 씨는 3월 공개적으로 왕세자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궁내청은 홈페이지에 각종 언론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를 올리며 대응하고 있다.

천황제가 사라질 것으로 보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왕실의 위상은 앞으로 왕실의 인기와 국민의 지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리라는 게 많은 일본인의 생각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우경화의 심연(深淵)에는 천황제가 있고, 일부 우익세력이 상징 천황인 일왕을 우경화의 동인(動因)으로 악용하는 데 대해 뜻있는 일본 지식인들의 개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쿄=배극인·박형준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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