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 씨. ‘의사와 시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다시 직업을 택한다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요. 항상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것을 만나니까 좋을 것 같아요. 또 내가 글도 좀 빨리빨리 쓰는 걸 잘해요. 허허.”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마종기 시인(74)은 10여 년 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부부 동반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뉴욕행 비행기가 대서양을 건널 때 긴급한 기내 방송이 나왔다. “기체 고장 때문에 프랑스 드골 공항으로 가겠다. 육지나 바다에 불시착할지도 모르니 비상사태에 대비하라.”
마 시인은 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한 기도는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함께 여행을 했고 바로 뒷좌석에 앉은 젊은 의사 부부가 한창 나이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많이 살았습니다. 그 대신 김 선생 부부를 살려주세요.’
16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당시 다급했던 상황을 들려줬다. 다행히 비행기는 회항에 성공했고, 승객들은 무사했다. “완전히 죽음과 직면한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기특해요. ‘나도 사람다웠던 적이 있구나, 나도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좀 건방진가요. 허허.”
올해 의사가 된 지 50년, 등단 54년을 맞은 재미 의사이자 시인인 그가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달)를 펴냈다. 아버지인 동화작가 마해송 선생(1905∼1966)에 관한 추억부터 연세대 의과대를 졸업한 뒤 1966년 수련의 자격으로 도미한 얘기, 의사와 시인으로 바쁘게 살았던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의 동생 얘기도 들어 있다. 동생 종훈 씨는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다 도미해 가발 매장을 운영했는데 1994년 자신의 매장에서 흑인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하지만 유족은 2011년 1월 범인의 사형 집행을 두 달 앞두고 ‘사형을 집행하지 말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해 한인 사회에 감동을 전했다.
“탄원서를 내자고 제가 먼저 나섰어요. 인간의 생명을 사람이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적인 이유가 컸죠. 조카도 ‘(사형을 집행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도 않는데…’라고 하더군요.” 동생의 얘기를 담담히 전하던 마 시인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마 시인은 2002년 의사로서 은퇴했다. 예순셋의 나이였다. “시에 대한 열등감도 한 이유였다”고 했다. 의외였다. 고국 문단에서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받은 문인에게 열등감이라니.
“예를 하나 듭시다”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평론가 남진우가 그의 시 ‘온유에 대하여’를 두고 ‘이제 일상어로서는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이 단어(온유·溫柔)가 이 시에선 왜 이리 친숙하면서 절실하게 느껴졌는지’란 글을 썼다. 마 시인은 뜨끔했다. 온유가 사어로 평가받는지 몰랐다는 것. “이런 게 열등감을 키웠지요. (이후론) 어떤 단어를 써놓고 이게 한국에서 쓰는 단어인지 아닌지 고심했어요. 한글로 시 쓰는 시인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합니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는 시인은 매년 봄이 되면 두 달여간 한국에 머문다. 지난달 한국에 들어올 때는 북한의 위협이 극에 달했던 시기여서 지인들이 방한을 말렸다고. 그때 시인은 “한국에서 죽으면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단다. 그는 사무치게 한국을 그리워했다. 50년 가까이 말이다.
“들어올 생각은 있는데 40년 넘게 미국에 사니 힘들어요. 와이프는 한국에 친구도 없고…. 결국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끝나지 않을까요. 이 나이 되고 보니 한국에서 살지 않은 게 후회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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