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어디에서 詩를 만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0일 03시 00분


계간 시인세계 ‘시가 된 그곳’ 특집… 12명이 쓴 시와 탄생 공간 전해

문인수 시인이 자주 찾았다는 강원 정선의 한 산골마을. 새벽을 여는 첫차엔 누가 몸을 싣고 있을까. 정선=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문인수 시인이 자주 찾았다는 강원 정선의 한 산골마을. 새벽을 여는 첫차엔 누가 몸을 싣고 있을까. 정선=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넛재 싸릿재 쇄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문인수의 시 ‘정선 가는 길’ 전문) 》

시인 문인수(68)는 강원 정선을 자주 찾는다. ‘그 어느 한쪽으로도 시계가 트인 곳이 없는, 험한 산세로 빙빙 둘러쳐진, 산간오지만이 갖는 그런 위압스런 사위(四圍)’라고 정선을 칭하는 시인. 그런 시상(詩想)은 그대로 한편의 시가 됐다.

계간 시인세계는 최근 펴낸 여름호에 ‘시가 된 그곳’이라는 기획특집을 실었다. 시인에게 각별하게 다가온 장소, 그 속에서 피어낸 시를 소개했다. 문인수 곽효환 황학주 유홍준 나희덕을 비롯한 시인 12명이 ‘시를 만난 공간’을 전한다.

시인은 한 장소에서 현재와 동시에 과거를 읽기도 한다. 곽효환(46)은 경남 통영에서 시인 백석과 그가 짝사랑했던 박경련을 떠올린다. 백석은 박경련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크게 낙심한다. 박경련을 ‘한 여인’으로, 백석을 ‘자작나무 닮은 사내’로 옮긴 곽효환의 시 ‘통영’의 일부는 이렇다. ‘비가 젖은 포구가 보이는/수루 앞 계단에 앉아/한 여인이 그리워/낡은 항구를 세 번 다녀간/자작나무 닮은 사내를 떠올린다…그가 끝내 만나지 못한 천희를/오늘 내가 그리워하며…지워지지 않는 젖은 얼굴을 닦는다….’

이영광(48)은 미당 서정주가 스물세 살 때인 1937년 몇 달 머물렀던 제주 남단 지귀도를 찾아가 청년 미당이 보았던 절망을 읽었고, 시 ‘공중의 인터뷰’를 쓴다. 다음은 시의 일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지귀에 갔네/절망도 벌떡 일어나 걸어야 할 것 같은 적막 속으로//이글거리는 갈대숲 너머는/동지나해구나 태평양이구나, ‘한바다의 정신병’이구나.’

나희덕(47)은 전남 순천시 와온해변을 꼽았다. 와온의 일몰에서 “뜨거운 성애 장면을 보았다”고 하는 시인은 시 ‘와온에서’를 얻었다.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지는 해를 품을 때,/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와온 사람들아,/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시인세계#시가 된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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