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인간의 몸짓이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1일 03시 00분


국제현대무용제 모다페 개막작 ‘바벨’ ★★★★

언어, 문화, 종교가 달라 서로 싸우는 무용수들. 싸움 도중 상의가 벗겨지며 언어가 아닌 피부로 소통하게 되고 화해와 융합으로 이어진다. 원더스페이스 제공
언어, 문화, 종교가 달라 서로 싸우는 무용수들. 싸움 도중 상의가 벗겨지며 언어가 아닌 피부로 소통하게 되고 화해와 융합으로 이어진다. 원더스페이스 제공
태초에 몸짓만이 있었다면 인간들은 이렇게 소통했을 것이다. 낮이면 원시적인 음성과 섬세한 제스처로, 밤에는 서로의 몸에 손가락으로 몸짓을 그려가며….

26일까지 열리는 제32회 국제현대무용제 모다페의 개막작 ‘바벨’은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해 언어, 국가, 종교, 정체성의 관계를 기하학적 구조물과 원시적 음악, 창의적인 몸놀림으로 풀어냈다.

17, 18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바벨’은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안무가 시디 라르비 셰르카우이와 다미앵 잘레의 작품이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한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으로 신이 분노해 인간이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됐다는 성경 이야기에 기초했다. 무용수 13명과 뮤지션 5명은 13개 국적과 15개 언어, 7가지 종교적 배경을 지녔다.

춤사위는 꽤 원시적이다. 언어가 생기기 전 사랑을 표현하는 남녀 무용수는 손가락 끝으로 서로를 만지다 온몸을 사용해 서로의 피부에 닿아간다. 만지는 것만으로 상대의 신경세포와 공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동 가능한 정육면체와 직육면체 모양의 알루미늄 구조물 5개는 언어로 인한 소통의 단절과 소외를 상징한다. 무용수들은 구조물을 서로 겹쳐 올리며 바벨탑을 쌓는다. 언어로 인간이 소외되는 순간이다.

후반부에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조롱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미국인 무용수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 레이디 가가도 쓰는 언어가 영어다”라며 다른 무용수들이 엉켜서 만든 로봇 팔다리로 왕처럼 군림하다가 싸움판이 벌어진다. 결국 싸움이 끝나고 남녀 무용수가 상의를 벗은 채 공연 초반 교감의 춤사위로 돌아간다. 더욱 깊은 교감으로 모든 무용수는 서로 화해하며 공연은 끝난다.

공연은 ‘피부를 제거해 나와 당신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의 마음을 오롯이 읽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음악은 북, 드럼, 단소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와 가사 없는 원초적인 목소리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자막 처리가 다소 아쉬웠지만 표현력이 뛰어나 언어가 다름에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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