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가 환갑이었죠. ‘봄, 우레’(가제)는 인생 이모작의 첫 작품입니다. 20여 년 동안 머릿속에 짜놓은 얼개를 이제야 옮기고 있습니다.”
14일 경기 의정부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만화가 이희재(61)는 한껏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그는 그림 뭉치를 꺼내 보였다. 검은 교복의 까까머리 학생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한지 위에 줄줄이 펼쳐졌다. 최근 작화에 들어간 작품의 장면들이다.
1970년 만화계에 입문해 1981년 ‘명인’으로 데뷔한 그는 국내에서는 드문 사실주의 만화의 대부로 불린다. 그의 작품들은 1980년대 운동권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 그의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골목대장 악동이’(1983년)를 시작으로 대표작인 ‘간판스타’(1986년) ‘새벽길’(1988년) 등에는 1980년대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대로 투영됐다.
작품들에는 고향을 떠나온 여공, 술집 종업원, 실직자와 환경미화원이 등장했다. 권력과 산업화의 화려함에서 밀려난 민초들의 삶이 가감 없이 펜으로 표현됐다. 그래서 그의 만화(漫畵)는 웃음과 가벼운 풍자가 아닌, ‘현실’이었다.
이희재는 1994∼2011년 ‘이희재 감동 한국사’로 아이들을 위한 우리 역사 만화를 그렸다. “그림을 익히고, 작화 기술도 다듬으며 어느 정도 세상살이도 알 만하다는 자신감을 채운 시기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역사만화가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는 생각에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감동 한국사’를 완결한 뒤 다음 달 출간 예정인 외국과 국내의 풍경과 스케치를 담은 ‘낮은 풍경’(애니북스)을 마무리했다.
올해 8월경 독자에게 선보일 ‘봄, 우레’는 1920년대 항일학생운동을 테마로 다룬다. 봄은 젊음, 우레는 이들의 아우성이 모인 항일운동을 뜻한다.
그는 20여 년간 묵혀온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1980년대 청계천 중고 책방에서 1970년 발간된 ‘광주학생독립운동사’라는 기록물을 처음 봤어요. 몇 사람이 체포됐는지, 당시 분위기, 신문 자료가 실린 책장을 조금씩 넘기다가 파고들게 됐어요.”
작가의 고향인 전남 완도군 신지면의 신지도. ‘봄, 우레’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장석천(1903∼1935)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완도에서 보낸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1922∼1995)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1959년 나온, 최금동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이름 없는 별들’만 1920년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민족대표 33인처럼 역사에 기록되거나 윤동주처럼 시어로 기억되는 이들도 있죠. 그러나 이들뿐 아니라 곳곳에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쓴소리를 했다. “1920년대 운명이 ‘배정’된 분들은 지금 80, 90대가 되셨죠. 한 나라의 보루인 젊은이들이 개인의 문제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가 안타깝습니다. 이들에게 역사 속의 청년정신을 어렴풋하게나마 전해주고 싶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