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세계 오디오 업계에 이른바 ‘하이엔드(high-end)’ 바람이 불었다. 미국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마크 레빈슨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개발한 프리앰프(입력된 소리 신호를 증폭해 메인 앰프로 보내는 장치) ‘LNP-2’는 ‘하이엔드 오디오 산업의 초석’으로 불린다. 이를 전후해 스레시홀드, 골드문트 등이 잇달아 관련 제품을 내놓으면서 ‘하이엔드 오디오’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번에는 콤팩트디스크(CD)가 빅뱅을 불러왔다. LP를 대체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시작된 움직임에 불이 붙은 것이다. 필립스와 소니가 이 움직임을 선도하고 나섰다. 잡음이 없는 깔끔한 음질과 긴 수명을 갖춘 CD는 디지털 오디오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2013년, 전문가들은 침체됐던 오디오 시장을 깨워줄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몇 년간 활동을 멈췄던 오디오파일(audiophile·오디오 애호가)들이 새로운 제품에 이끌려 돌아오기 시작했다.”(오승영 오디오 평론가)
“최근 수년 동안 오디오 시장에는 큰 혁신이 없었다. 몇 가지가 개선된 다음 가격대만 높아지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하이엔드 오디오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나상준 오디오갤러리 대표)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오디오들은 지난해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와이어리스 하이엔드 스피커 제품과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본 제품이다. 이 오디오들은 저렴한 가격, 간편한 설치, 소형화 등의 강점을 앞세워 오디오 입문자들의 진입 문턱을 낮춰주고 있다. ▼ 스피커에 DAC-앰프 탑재, 가격 부담 ‘뚝’ ▼
하이엔드, 가격으로 유혹하다
프랑스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인 드비알레는 9∼12일(현지 시간) 독일 뮌헨에서 진행된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쇼 2013’에 참가해 와이어리스 신제품인 ‘드비알레 110’ ‘드비알레 240’ 등을 소개하며 전시장 한가운데에 ‘언젠가 모든 사람이 드비알레 제품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가격대를 다양화하고 쉽게 설치하게 해 기존 하이엔드 고객뿐만 아니라 초심자들도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드비알레는 이를 위해 기존 단일 모델로 출시됐던 ‘디 프리미어’와 같은 수준의 제품인 ‘드비알레 240’의 가격을 2000만 원으로 약 500만 원 낮추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모델 두 개도 추가했다. 가장 저렴한 ‘드비알레 110’의 경우 기존 제품에 비해 가격은 3분의 1인 800만 원대에 불과하다. 여기에 향상된 와이어리스 기능을 탑재해 케이블이 없어도 프로세서와 스피커만으로 오디오 세트를 구성할 수 있게 했다. 이 제품들은 이르면 6월 한국 시장에도 선보인다.
드비알레 외에 다양한 신진 하이엔드 오디오 제조업체들도 약속이나 한 듯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을 선보였다.
스위스 오디오 브랜드 골드문트에서 10월 선보이는 엔트리급(초급자용 또는 기본 모델) 오디오 세트인 ‘탈리스만 세트’는 이전 제품의 절반 가격인 800만 원대로 출시될 예정이다. 같은 시기에 출시되는 최고급 한정판 ‘아폴로그 애니버서리 스피커’의 가격은 5억5000만 원대로 이전 모델과 같지만 안에 앰프와 디지털아날로그컨버터(DAC)가 들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가격이 내려간 셈이다.
오 평론가는 “신흥 브랜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높은 수준의 소리를 내는 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며 “가격은 싸지만 2000년대에 중급 이상으로 평가받았던 제품들과 비슷한 음질을 낸다”고 말했다.
▼ 와이어리스-디지털 기술 향상, 입문자들 환경 최상급 ▼
하이엔드, 점점 더 쉬워지다
최신 기술이 속속 도입되며 하이엔드 오디오들은 더욱 쉬워지고 있다. 다루기도 쉽고, 설치도 쉽다. 집 안을 전선으로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오디오 업체들이 와이어리스 기술과 디지털 음원 재생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하이엔드 오디오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CD플레이어처럼 음원을 재생해주는 소스기기, 프로세서, 프리앰프, DAC, 스피커, 여기에 제대로 된 케이블까지 갖춰야 했다. 하지만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일체형 스피커는 이런 불편을 해소했다. 스피커에 DAC, 프리앰프 등을 모두 포함해 기존의 복잡한 구성을 소스기기, 트랜스미터 또는 와이어리스 프로세서, 스피커의 세 단계로 줄여준 것이다.
또 프로세서와 스피커를 무선으로 이어주기 때문에 전원을 연결할 때 외에는 다른 케이블이 필요 없다. 예전에는 여러 기기에 연결된 두꺼운 케이블을 숨기려 바닥의 콘크리트를 선 모양에 맞춰 깎아 내기도 하고 실내 이곳저곳을 전선으로 도배하다시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와이어리스 방식은 예전에도 몇 차례 선보였지만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무선 마우스나 블루투스에서 사용하는 2.4Ghz 대역의 신호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간섭이 생겨 잡음이 생기거나, 일정 주파수 대역 이상의 소리를 전송하지 못하는 ‘커팅 현상’ 때문에 완전무결한 소리를 전송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주된 평가였다. 하지만 최근 출시되는 제품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대표적인 제품이 다인오디오의 ‘세오(Xeo) 시리즈’다. 이 제품은 2.4Ghz 대역을 사용하면서도 신호 간섭을 극복한 것이 특징이다. 또 3쌍의 스피커에 동시에 같은 신호를 보낼 수도 있다. 트랜스미터 근처에만 있다면 3개의 다른 방에서 같은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나 대표는 “PC-FI(PC와 하이파이를 합친 말)를 이용한 음원 재생도 가능해지는 등 입력장치도 다양해졌다”며 “고음질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확대되면 오디오 입문자들이 한층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국내 업체의 음질 기술은… 아이리버 ‘아스텔앤컨’ 해외서도 호평 ▼
하이엔드 사운드를 위한 노력은 국내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많은 업체가 연구개발(R&D)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얻어냈다.
아이리버에서 지난해 출시한 ‘아스텔앤컨 AK100’은 국내 최초의 포터블 하이파이 오디오 기기다. 크기는 가로 5.9cm, 세로 7.9cm, 두께 1.4cm이며 무게는 122g에 불과하다. 하이엔드 헤드폰 하나만 있다면 어디서든 높은 수준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아스텔앤컨’에는 영국 울프슨에서 제작한 DAC가 채택된 것이 특징이다. 아이리버는 가정용으로 제작하던 이 부품을 작게 개선하고, 하이파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신호로 개선하기 위해 6개월이라는 기간을 투자했다. 여기에 음질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만드는 데 또 6개월이 걸렸다. 또 전력 손실이 큰 하이파이 기기의 특성상 충분한 재생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최적화 과정도 거쳤다.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홍콩과 중국, 미국 등 20개국에서 1만5000대를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정보기술(IT) 전문 저널리스트 월트 모스버그는 2013년을 이끌 개인용 IT 중 하나로 ‘고음질 전용 고급 뮤직 플레이어’를 꼽고, 대표 제품으로 아스텔앤컨을 소개하기도 했다.
케이블 제조 기술에서도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이고 있다. 시그마와이어랩, 엠씨랩 같은 업체들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엠씨랩의 ‘솔리톤’ 케이블은 대부분의 케이블이 중국이나 대만에서 제조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 전량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은 또는 구리를 녹여 층층으로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 소리의 손실이나 왜곡을 최소화했다. 정성이 들어간 만큼 가격도 만만찮다. 길이 1m의 케이블 가격은 100만∼400만 원대에 이른다.
오승영 오디오 평론가는 “케이블은 신호를 전송할 때 어떤 왜곡도 생기지 않게 하는 압축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며 “최근 국내 케이블 업체의 기술력은 케이블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80, 90년대 제품과 맞먹을 정도”라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 디지털 음원도 고음질 시대…원본 99%까지 재현하는 MQS파일 ‘날개’ ▼
MP3파일이 CD 시장을 잠재운 결정적 이유는 편리함 덕분이었다. 10여 곡을 들을 수 있는 CD를 가수별로 들고 다니기보다 4∼10MB(메가바이트)인 MP3파일을 기기에 넣고 음악을 듣는 것은 혁명적이었다. 도구는 소니 ‘워크맨’에서 애플의 ‘아이팟’으로 바뀌었고 산업은 음반에서 음원으로 옮겨갔다. 음질은 논외였다.
그 음질 얘기가 최근 다시 나오고 있다. 디지털 음원 분야에서도 고음질 파일에 대한 수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아이리버콘텐츠가 운영하는 음원 사이트 ‘그루버스’에서 ‘MQS’(마스터링 퀄리티 사운드) 파일이 나오고 전용 플레이어도 등장하면서 음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MQS 파일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원 파일 원본(WAV 파일)을 그대로 응축하는 형태다. 용량을 줄이기 위해 고음과 저음을 깎아 음원을 압축하는 MP3파일과는 다르다. 손실이 거의 없어 ‘무손실 음원’이라고 부른다.
전이배 아이리버콘텐츠 컴퍼니 사장은 “스튜디오 원본 음원 음질을 100이라고 하면 MQS는 95∼99, CD는 60, MP3파일은 20 정도로 보면 된다”며 “악기 연주, 가수 음성 등을 한데 섞어 비빔밥 형태로 듣는 것이 MP3파일이라면 MQS는 연주와 음성을 하나하나 따로 듣는 입체 음원”이라고 말했다. 용량도 MP3파일 한 개 용량이 4∼10MB인 데 비해 MQS파일 용량은 70∼100MB에 이른다. 최근 10년 만에 새 음반을 낸 가수 조용필도 19집 앨범 ‘헬로’ 전곡을 MQS파일 형태로 내놨다. ‘봄여름가을겨울’, 아이돌 그룹 ‘2AM’, 미국 록 밴드 ‘본 조비’ 등 국내외 가수들이 앞다퉈 고음질 앨범을 내고 있다.
스마트폰 등 휴대전화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음악을 듣는 ‘스트리밍 서비스’도 고음질 시대가 됐다. LG유플러스와 음원 사이트 ‘엠넷’이 내놓은 ‘HD 뮤직’이 대표적이다. 롱텀에볼루션(LTE) 망을 이용해 기존 스트리밍 서비스 전송 속도인 초당 128kb보다 3배 가까이 빠른 초당 320kb로 음악을 전달해 잡음 없이 깨끗한 음질로 실시간 들을 수 있게 했다. 엠넷이 보유한 스트리밍 서비스 음원 220만 곡 중 160만 곡을 이런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 이자영 LG유플러스 엔터테인먼트사업팀 과장은 “고객이 소장하고 있는 음원을 MQS파일로 바꿔주는 서비스도 하반기(7∼12월)에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음원 시장에서의 ‘고음질 찾기’ 붐은 이어폰과 헤드폰 시장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이어폰·헤드폰 시장 규모는 약 1000억 원대로 나타났다. 올해는 1100억 원으로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수십만 원부터 수백만 원대의 비싼 제품을 구입해 ‘좋은 소리’를 들으려는 젊은층이 늘면서 디지털 음원도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것이다.
전 사장은 “고음질 영화관이 별도로 생길 정도로 음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졌고 바쁜 일상 속에서 좋은 음악을 통해 치유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며 “MP3파일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에서 다시 음악을 소유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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